감사일기
오늘 아침, 우연히 TV에서 롯데 LPGA 챔피언십을 보았다.
김효주 프로가 내내 리더보드의 맨 위를 지켰지만, 파이널 홀에서 단 한 타 차로 황유민 프로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리딩하던 선수가 막판에 역전당하는 일은, 그 어떤 패배보다 깊은 상실을 남긴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한 프로도 연장전 끝에 패한 뒤, 몇 해 동안 씨드조차 얻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김효주는 갤러리를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승패를 책임질 줄 아는, 진정한 프로의 모습이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구절이 떠올랐다.
“은메달보다 동메달이 더 행복하다.”
은메달은 져서 얻은 것이고,
동메달은 이겨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는 것도 훈련이다.
삶은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잘 지는 법을 배운 사람은 회복이 빠르다.
넘어지며 배우고, 깨닫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것.
그것이 ‘잘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의 모습이다.
오늘 경기를 보며, 이런 과정을 지나 여기까지 온 나 자신에게도 말해본다.
“그래, 전혜민.
넘어지고 흔들리며 여기까지, 잘 지며 오느라 참 애썼다.”
오전 운동을 마치고, 정인 언니의 제안으로 횡성 백일홍 축제에 다녀왔다.
보슬비가 내리고 행사장은 흙탕물로 가득했지만, 수천 평 들판에 핀 천만 송이 백일홍은 궂은 날씨 속에서도 환히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멀리 산그리메가 비에 젖어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각종 음식점과 놀이시설, 장기자랑 무대까지. 그 안에는 수도 없는 사람들의 손길과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문득 곡성 장미축제가 떠올랐다. 전국에서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오던 풍경, 몇 해 전 내가 호스트가 되어 서울대 인문학 과정 원우들과 함께 참여했던 기억, 그때 느꼈던 자부심이 오늘 다시 살아났다.
지역마다 피는 꽃처럼, 지역마다 특색을 살린 지자체 행사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런 정성들이 이어져 이 땅의 격차가 조금씩 줄고,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이 넓어지기를 꿈꿔본다.
오늘의 백일홍은 비에 젖어 더 깊은 색으로 피어 있었다.
많은 사람의 정성이 빚어낸 이 풍경 앞에서, 감사한 하루를 보냈다.
저녁에는 KBS2에서 방영된
‘조용필 가왕의 이 순간을 영원히’
고척 스카이돔 공연 녹화방송을 보았다.
티켓 오픈 3분 만에 매진된 공연, 데뷔 57주년을 맞은 가왕의 무대, 무려 17년 만의 지상파 방송 출연이었다.
조용필.
올해로 일흔다섯이지만, 무대 위의 그는 여전히 젊었다. 목소리도, 눈빛도, 무대 매너도 변함없었다. 그는 여전히 우리 세대의 ‘영원한 오빠’였다.
정규 앨범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앞으로는 2년에 한두 곡, 힘들면 3~4년에 한두 곡을 내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 속에는 세월을 견뎌낸 장인의 유연함과 겸손이 담겨 있었다.
무대에서 그는 단 두 시간 동안 28곡을 혼자 소화했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노래마다 청춘의 뜨거움과 삶의 깊이를 실어 보냈다.
요즘은 가사가 잘 들리지 않는 노래가 많다. 나는 가사가 읽히는 노래, 감정이 전해지는 노래가 좋다. 조용필의 노래는 한 편의 시이자 문학 작품 같다.
공연을 보며 입술이 저절로 따라 움직였다. 모르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노래는 내 청춘의 시간표였고, 삶의 굴곡마다 흘러나오던 위로의 멜로디였다.
조용필은 남녀노소 전 세대를 아우르는 대중성과 음악성을 함께 품은 가수다.
“노래를 부르다 죽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그 길 위에서 우리 모두의 삶과 함께 노래하는 전설이다.
한 시대를 함께 걸어온 그에게, 오늘 마음 깊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의 노래로 젊음을 건너왔고,
그의 노래로 지금도 마음이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