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

흑백요리사를 보다가

by 여울
흑백요리사 시즌2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때, 무엇을 할 것인가?_흑백요리사를 보다가>


흑백요리사 시즌2 TOP7 경진은

겉으로 보면 ‘무한한 기회’가 주어진 무대였다.


180분의 요리 시간,

500가지가 넘는 재료,

요리 횟수의 제한도 없고

주제조차 스스로 정해야 하는 조건.


심사는 안성재 셰프와 백종원 대표가 맡았고,

두 사람의 점수를 합산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우승하는 서바이벌 요리 대결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셰프들에게 주어진 이 모든 풍성한 조건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에 가까웠다.


셰프들은 넘치도록 신선하고 다양한 재료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재료가 많다는 건

선택해야 할 가능성이 늘어난다는 뜻이었고,

시간이 넉넉하다는 건

결단을 미루게 만드는 함정이 되었다.


만들 수 있는 요리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은

오히려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상태를 만들었다.

요리의 완성도 이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부터가

이미 가장 큰 난제였던 셈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셰프들은

여러 개의 요리를 선택했다.

3~4가지, 어떤 이는 5가지 이상의 요리를 선보였다.

시간이 넉넉하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주어진 자원을 모두 활용하려면

많은 요리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TOP7 서바이벌의 결과는 달랐다.


1위를 차지한 셰프는

180분 동안

단 하나의 요리에만 집중한

최강록 셰프였고,

윤주모 역시 같은 전략으로

2위에 올랐다.


많이 만드는 대신

깊이 파고드는 선택.

가능성을 넓히는 대신

하나의 방향으로 밀고 가는 결단.


많음이 아니라 깊음,

확장이 아니라 집중.

그 차이가

결과를 갈랐다.


이 장면을 곱씹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른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유독 즐겨보는

냉장고를 부탁해다.


이 프로그램의 조건은

흑백요리사와 정반대다.

요리 시간은 단 15분.

재료는 셀럽의 냉장고 안에 있는 것뿐.

주제는 명확하고,

요구는 분명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 안에서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극단적인 제한 속에서

셰프들은 오히려

셀럽들이 놀랄 만큼의

요리 실력을 선보인다.


망설일 시간은 없고,

선택은 빠르며,

집중도는 깊다.

제약은 방향이 되고,

결핍은 창의력의 중심이 된다.


두 프로그램을 나란히 놓고 보니

차이는 분명해진다.


흑백요리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를 시험하는 무대이고,

냉장고를 부탁해는

‘이 안에서 반드시 답을 내야 하는 상태’를 훈련하는 무대다.


하나는 가능성이 너무 많아 흔들리고,

다른 하나는 제한이 분명해 중심을 잡는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믿는다.

시간이 많으면,

돈이 넉넉하면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대책 없는 풍요는

잘 쓰이지 못할 때

오히려 삶을 더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


선택지는 많아지고,

결단은 늦어지고,

집중은 분산된다.


반대로

조건이 제한될수록

우리는 본질에 가까워진다.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 해야 하는 것,

지금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또렷해진다.


풍요는 축복이지만

동시에 시험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삶은

무엇을 할지

스스로 정해야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이 할 수 있는 삶보다

한 가지에 깊이 머무를 수 있는 삶을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다.


500가지 재료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15분의 긴장처럼

내 삶에도

의도적인 제한을 걸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안성기, 국민배우의 마지막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