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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린저녁 Apr 28. 2017

한 장에 만오천원짜리 팬티

닮지 않은 듯 닮은 부부

"자꾸 싼 것만 사오지마!"

"이거 또 세일하는 거 산거지?"

"돈 걱정하지 말라니까"

"비싼거 사랬지? 계속 그러면 너한테 말안하고 내맘대로 살거야"


 결혼하고 남편에게 주기적으로 듣는 잔소리가 있다. 물건을 사는 기준이 다른거라고, 나도 오래 쓸 물건과 금방 쓰고 말 물건을 구분해서 사고 있는 거라고, 싸고 성능까지 좋은 물건을 사면 가성비가 좋으니 좋지 않냐고 항변해봐야 소용없다. 남편은 이미 알고 있거든. 내가 지지리 궁상을 피우고 있는 거라는 걸.


 그래도 가끔은 정말 억울할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성비가 정말 끝장인 물건이라 잘 샀다 싶을 때, 비싼 거나 싼 거나 큰 차이가 없는 물건(예를 들어 화장품 같은)을 고를 때 등등.


 그치만 우리 남편은 이미 '아내가 사온 물건=가격이 싼 걸 기준으로 산 걸거야'라는 공식이 머리에 박혀서 내 억울함을 도통 믿어주지 않는다. 물론 그 공식을 만드는데 일조하긴 했지 내가.


 임신 14주가 넘어서니 서서히 기존에 입던 속옷이 맞지 않게되어 임산부들에게 해방감을 준다는 속옷을 몇 벌 구매했다. 그전까지 속옷은 그냥 싼 거 사서 짧게 입고 버리는게 낫다는 내 지론으로 5개에 9900원짜리 속옷, 한 장에 이삼천원하는 속옷 위주로 사입던 나는 팬티 한 장에 만오천원이나 하는 비싼 임산부 속옷을 입고 잔뜩 흥분해서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다. "역시 비싼 건 이유가 있어! 속옷을 안 입은거 마냥 완전 편해! 우키키키"

순간 아차했는데 역시나 남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콧대를 세우며 "것 봐 내가 비싼 거 사랬지. 앞으로 이런 건 비싼 것만 사. 비싼 건 비싼 만큼 이유가 있다니까" 등등의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래. 내가 내 이미지를 깎아먹고 있지. 아무리 속옷이 편했어도 '품이 넉넉한 거 말고는 싼 속옷이랑 크게 다르지 않네', '싼 것도 입을만 하다니까 비싸다고 다 좋은 건 아니야' 라고 시치미 뚝 떼고 내 자린고비 지론을 강조했어야 했는데...  


 비싼 속옷을 깨끗하게 빨아 속옷함에 잘 개어놓았다. 내 것만 사기엔 미안해서 같이 산 한 장에 만구천원하는 남성용 팬티도 남편 속옷함에 슬쩍 넣어놨다. 바보 남편은 자기는 만구천원짜리나 오천원짜리나 구분이 잘 안가니 자기 거는 그냥 싼 거 사란다. 으이구 바보!


 닮지 않은 듯 닮은 우리 부부의 남색 고오급 팬티.

앞으로 속옷은 고오급으로만 사야지. 대신 닳고 닳을 때까지, 엉덩이에 구멍이 쑹쑹 날 때까지 입어야겠다. 그래야 돈 준 값을 했다고 흐뭇해할테니까. 누가? 자린고비 아내가 이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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