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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Jun 22. 2021

맥심 커피믹스 모카골드

이번에도 엄마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약국에는 만성적인 위염 또는 식도염 때문에 처방전을 들고 오시는 분들이 많다.


이런 환자 분들에게 약을 드릴 때에는 항상 평소의 식습관을 체크한다. 술은 드시는지, 야식을 즐겨 드시는지, 일부러 야식을 먹진 않더라도 저녁 먹고 바로 눕는 건 아닌지,  밀가루 음식, 카페인 섭취 등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최근 스트레스 받는 일은 없었는지, 먹고 있는 다른 약은 뭐가 있는지.


그런데 이렇게 복약상담을 하다 보면, 상당수의 중년 여성분들에게서 공통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이 분들은 커피를 참 좋아하신다. 아메리카노나 블랙 커피를 좋아하신다는 분들도 간혹 계시지만, 믹스 커피를 즐겨 드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이 분들께 믹스 커피에 들어있는 당분과, 유지방과, 고농도의 카페인이 상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으니 좀 줄여 보시도록 설득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러운 일과가 되었다. 대부분의 환자분들은 이에 잘 수긍하시고, 끊어 보겠다는 말씀과 함께 약을 받아 가신다.


그러나 내가 절대 설득할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분이 한 분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엄마다.



엄마의 하루는 믹스커피로 시작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 없단다. 여러 번 말려도 보고, 원두커피를 내려 드실 수 있도록 커피머신도 사 드렸다. 하지만 커피머신은 고스란히 아빠의 전유물이 되었다. 엄마에게는 카페인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에겐 믹스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는 것이, '오늘 정OO씨의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를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의례와 같은 것이다.


아참, 믹스커피는 반드시 맥심 커피믹스 '모카골드'여야 한다. 맥심 커피믹스 '오리지널', '디카페인', '화이트'는 안 된다. 한창 부드러운 맛으로 인기를 끌었던 프렌치카페에서 나온 커피믹스도 엄마의 입에서는 거부한다. 오로지 황금색 스틱, 맥심 커피믹스'모카골드'여야만 한다. 카제인나트륨 대신 우유가 들어 있다고 광고하는 다른 커피믹스들은 입 안이 끈적끈적해지는 느낌이란다. 저칼로리 믹스커피는 말해 무엇하겠나. 칼로리를 반으로 낮췄다는 맥심 모카골드 1/2 스틱을 박스채 사 갔던 날, 그 커피는 그대로 내 차에 실려 다시 돌아왔다. "딸, 이건 너나 먹어라. 엄마 입엔 안 맞네."


당연히 '바닐라 라떼', '모카초코', 등의 이름을 붙인 화려하고 값이 더 나가는 커피믹스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으신다. 그러니 어딘가 여행을 가더라도 엄마 가방에는 항상 맥심 모카골드 스틱 서너개는 들어 있어야 한다.




음식을 가려 먹어야 할 만큼 위 상태가 좋지 않으시고, 간헐적인 공황 증세도 있으셔서 카페인 섭취는 최대한 피해야 하는 엄마이기에 십년 넘게 나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해왔다. 엄마, 제발 믹스커피 좀 그만 드세요. 엄마 힘든 증상 나타나는 거 8할은 이 커피믹스 때문일 것 같아. 조금만 참아봐요 응?


하지만 엄마는 다른 음식은 다 참아도, 믹스커피는 못 참겠다 하신다. 건강이고 나발이고, 이 커피 한잔이 엄마에게는 위로가 되고 평화가 된다고 한다. 옛날 옛적,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떠나 보낸 장례식장에서, 쓰러질 때까지 오열하며 진이 다 빠졌던 엄마를 기억한다. 엄마를 달리 위로할 수 없어 옆에서 함께 훌쩍훌쩍 울고만 있던 어린 나를 바라보며 창백한 얼굴로 엄마는 말했다. "딸, 엄마 커피 한잔만 타다 줘." 어느 때보다도 커피를 맛있게 타야겠다고 생각하며 벌떡 일어나 맥심 커피믹스를 머리에 이고 있는 정수기로 달려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믹스커피, 특히 맥심 믹스커피와 엄마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믹스커피를 못 먹게 할라치면 갑자기 애교를 부렸다 떼를 썼다 어린애처럼 구는 엄마. 이게 도대체 뭐라고 싶으면서도 그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고 해서 할 수 없이 커피를 넘겨 드리게 된다. "한 모금만 드셔." 다행히도, 그러면 정말 한 모금만 드신다. 그 한 모금이 그렇게 좋으시단다.



엄마의 커피 사랑은 사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학원을 하나 운영하고 계셨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학원이었다. 고운 얼굴로 시원시원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엄마의 수업은 인기가 많았고, 학원은 언제나 학생들로 바글바글거렸다. 엄마는 일이 너무 바빴지만 두 딸도 동시에 보살펴야 했기에, 학원 바로 옆의 공실까지 나란히 임대해 우리를 거기서 길렀다. 수업이 한 타임 끝날 때마다 엄마는 옆방 문을 열고 우리를 보러 오셨다. 어느 겨울날 뜨끈한 장판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엄마의 저녁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잠들던 기억이, 내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있어 중요한 단편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밤낮없이 바빴던 30대의 엄마는, 자연스럽게 믹스커피를 달고 살게 되었다. 당시엔 믹스커피 종류도 그리 많지 않았다. 네스카페, 맥스웰하우스, 맥심. 그 중에 맥심이 제일 맛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노란색의 맥심 커피만 가져다 두셨다. 이게 제일 따뜻하고 부드러운 맛이라고 했다.


엄마가 매일 물을 끓이던 오래된 금속 전기포트도 기억난다. 무슨무슨 키친이라는 로고가 박혀 있었던 것 같은데. 끓이기 전의 비릿한 수돗물 냄새, 그리고 뽀얀 김을 씩씩하게 내뿜는 그 전기포트의 모습은 지금도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엄마는 물이 끓는 3분 동안 가만히 서서 그 포트를 바라보며, 금속포트 표면에 흐릿하게 비친 자신의 실루엣을 보며, 보글보글 소리를 들으며 잠시 머릿속을 정리하곤 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물이 끓자마자 컵에 붓고, 빈 커피스틱 봉투로 휘휘 저어 섞고, 커피를 마시고, 양치를 하고, 바로 다시 다음 수업을 준비하곤 했다. 엄마가 있는 공간에선 항상 맥심커피 냄새가 났다.


그런 엄마 덕에 나도 어릴 때부터 믹스커피를 또래들이 네스퀵 먹듯 먹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우유 급식이 나오면, 그 우유를 한 모금 마신 뒤 커피믹스 분말을 부어 쉐킷쉐킷해서 먹곤 했고, 엄마 몰래 가져온 커피스틱을 친구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난 너네처럼 네스퀵 안 먹어. 난 어른처럼 커피 먹어. 약간 이런 쓸데없는 허세도 있었더랬다. (아. 혹시 그때 믹스커피를 그렇게 안 마셔 댔으면 지금 키가 더 컸을까?)


엄마는 우리에겐 커피를 먹지 말라고 했지만, 엄마가 미리 끓여 냉장고에 넣어둔 냉믹스커피를 몰래 한모금씩 훔쳐 먹으면, 아아 그것은 엄청난 꿀맛이었다. 지금도 너무너무 피곤할 때에는, 현대 도시인의 상징인 아메리카노는 개뿔, 믹스커피가 간절해진다. 등산을 가 정상에 오르면, 때로는 미리 보온병에 담아온 믹스커피를 먹고 싶다. 나 역시 이렇게 믹스커피에 대한 애정이 있기에 엄마의 마음을 아예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엄마의 건강이 좋지 않은 만큼 믹스커피를 제발 줄여보시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지난 휴가 때 친정에 내려갔을 때에도 그랬다. 어김없이 아침부터 커피를 찾고, 자기 전에도 커피를 마시려는 엄마에게 내가 또 잔소리를 해대자 엄마가 갑자기 조용히 말씀하셨다.


<딸, 솔직히 말하면, 엄마는 이 커피를 잠이 깨려고 먹는 것도 아니고 단 게 먹고 싶어서 먹는 것도 아니야. 엄마는, 이 커피를 먹으면 옛날 생각이 나. 밤낮 애들 가르치고 너네 키우고, 바쁘고 힘들었지만 열심히 살던 젊은 시절이 떠올라서, 엄마는 그게 그리워서 이 커피를 마시는 거야. 많이도 안 마시잖아. 그냥 이 한 모금을 마시면, 향을 맡으면 그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 그게 좋아서 그래.>


그러니까 엄마에게 맥심 모카골드는, 젊은 에 대한 향수였던 것이다.

한 푼도 없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시작해서, 가정을 일구어 내고, 학원을 키워내고, 자식들을 길러낸 엄마를 버틸 수 있게 해 준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그 황금색 스틱이었던 것이다. 커피를 너무 자주 담아내어 바닥이 갈색으로 변해버린 오래된 머그잔들, 엄마와 무수한 세월을 함께 해 온 그 머그잔들도, 엄마는 그래서 차마 버리질 못한다고 했다. 걱정과 한숨으로 무수한 밤을 지샐 때에도 그 컵들이 엄마의 곁을 지켰을 테니까.


엄마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옆에서 고스란히 보면서 자라온 내가, 이렇게 애잔한 엄마의 고백을 듣고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엄마에게 지고 만다. 추억에 촉촉히 젖은 눈빛을 한 엄마에게 지고 만다.


"알았어요. 한 모금만 드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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