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정리했다. 세 번의 계절이 지나갈 동안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겨울 옷들을 꺼내어 숨을 틔워 주었다.
보풀이 심하게 일어나 외출복으로서는 더는 입을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여전히 내가 놓지 못했던 옷들이
한 무더기 튀어나왔다. 소중하다고 느껴서 끌어안고 있던 옷들은 아닌데, 사실 이쯤 되면 이들은 내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싶다.
생애 처음으로 밴드 키보디스트로서 무대에 섰을 때 입었던, 언니가 골라 준 펄이 잔뜩 들어간 니트에는 이제 커다란 얼룩이 생겨 버렸다. 언제 생겼는지도 모를 얼룩. 추억이 배어 있는 옷이라 남겨 두고 싶었는데, 이제는 미련을 견디고 보내 줘야 할 것 같다.
나름대로 깨끗하게 잘 털어서 넣어둔 옷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홉 달만에 꺼낸 이 두꺼운 섬유들 사이사이에서는 기다란 머리카락들이 자꾸만 고개를 내밀었다. 한편,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여름 가을 옷들에서도 계속해서 머리카락이 등장했다. 조금 더 어렸던 나의 머리카락과 조금 더 나이 든 나의 머리카락들이 조우하는 시간이, 얼떨결에 마련되었다.
겨울 옷에서 나오는 머리는 붉은색을 띄고 있다. 겨울을 맞아 아마 웜톤으로 염색을 했을테지. 좀 더 단정했고 차분했던 계절이었다. '약사'의 삶에 좀 더 가까웠던 시절의 머리카락. 탈색을 하기 전이라 당시에는 좀더 윤기를 띄고 있었을, 그런 머리카락이다.
여름 옷들에서는 거의 하얀 빛을 띈, 노랗게 탈색된 머리카락이 등장했다. 노란 머리였던 나는 좀 더 자유로웠고 좀 더 활발했고 좀 더 '악사'에 가까웠다. 제주에서 백수로서의 한 달을 보내며 원없이 걸었고 원없이 작업했고 원없이 음악을 들었다. 밝은 머리 덕에 기분까지 가벼웠던 그 때.
다시 까만 머리로 돌아온 지금 시점에서, 이미 지나버린 시절의 머리카락들을 주섬주섬 떼어내다 보니 과거의 나를 들여다 보는 기분이 되어, 잠시 묘했다. 아주 작은 신체 조직이지만 그래도 나의 조각들 아닌가. 노란 빛깔의 머리를 했던 나와 빨간 빛깔의 머리를 했던 내가 그 당시에 했던 생각들마저 이 머리카락에 묻어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잠시 묘한 기분이 들어서, 모아놓은 머리카락들을 조용히 또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곧 잘 모아올려 휴지통에 버렸다. 그 때의 모든 시간들,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