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매일 그 이름에 숨을 불어넣는 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
유난스럽게 추운 날이었다.
날이 쌀쌀할 때면 쌍화탕이나 판피린을 자판기 커피 뽑아 먹듯 집어 가시던 손님들마저 오늘은 보이질 않았다. 이렇게 심하게 추운 날은, 약 좀 먹겠다고 약국으로 가다 얼어붙느니 집에서 등 지지면서 앓고 말지, 하시는 모양이다.
아침의 얼음장 같던 공기가 조금은 누그러질 무렵, 약국 통유리로 들어오는 햇빛을 등에 업고 한 어르신 손님이 들어오셨다. 환한 빛깔의 털 코트에 우아하게 베레모를 올려 쓰신 어머님. 처음 뵙는 얼굴의 손님이다. 연세가 지긋하신데도 신경 써서 곱게 단장하신 모습, 이전에 한 번이라도 뵌 적이 있다면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으셨을 분이었다. 손가락 끝의 밝은 매니큐어 색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몸이 아파 병원을 방문해 진료를 받고 오신 어르신들 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고운 차림의 어머님이셨다. 처방전에 적힌 나이가 도저히 어르신의 외양과 매치가 되지 않아 남의 처방전을 들고 오신 줄 알았을 정도로, 허리는 꼿꼿하셨고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어르신은 생전 없었던 증상이 나타나셨다고 이것 저것 물어오셨다. 질문이 많으신 손님이었다. 다행히 손님이 많지 않은 날이라 약 설명을 충분히 길게 해 드리고 증상에 대해 같이 고민도 해 드리면서 십 분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큰 병원에 가셔야 하는 상황이 의심되어 꼭 소견서를 들고 대학병원에 가시도록 신신당부를 드렸다.
잠시 후, 잘 설명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핸드백을 쥐고 뒤돌아 가시려던 어르신이 잠깐 머뭇거리시더니,
여태까지의 힘차던 목소리를 한껏 웅크린 채, 귓속말하듯 내게 비밀스럽게 한 마디를 건네셨다.
"나 OOO 엄마에요."
갑자기 너무 작아진 어머님의 목소리에 당황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되물었다.
"네?"
"나, 연예인 OOO 엄마에요."
순간 머릿 속에서 빠르게 검색 엔진이 돌아갔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를 순식간에 기억 속에서 찾아 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0년이 되었지만, 세피아 빛으로나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창 전성기 때에, 사람들에게 많은 웃음을 주다가 갑작스럽게 떠나신 분이라 더더욱 기억에 남아 있는 분이었다. 어린 시절 조그만 텔레비전 속 재미있던 아저씨,에 대한 기억들이 반투명 필름이 되어 떠올랐다.
아, 어머님 그러셨어요, 그 뒤에는 사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몰라, 그냥 반가운 웃음만 지어 보였다.
어르신도 마스크 위로 눈웃음을 지어 보이시고, 그 말을 끝으로 수줍게 총총 걸어 나가셨다. 어르신의 뒷모습에 마음이 아렸다. 어머님은 저 말씀을 내게 하시고 싶어 그렇게 긴 질문과 대화를 시도하셨던 것일까. 언제부터,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신 날은 얼마나 되실까. 그 분을 기억할 리 없는 이십대에게 이 말을 했다가 행여 무안함에 상처를 받으신 적은 없었을까.
어르신은 어떤 마음으로 매번 이 말을 하실까.
이미 떠나간 아들이, 너무 빨리 가 버린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을 아들이,
어머님 본인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라도 사람들에게서 절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 누군가는 기억하고 알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게 설령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약사일지라도.
OOO 엄마에요, 그 말은, 우리 OOO 좀 기억해 주시겠어요, 와도 같은 말씀이셨을 테지.
살아 있었다면 아직까지도 수없이 불렸을 이름, 그것이 미처 다 불리지 못해 아들이 한스러워 할까봐, 어머님이 이렇게라도 조용히 그러나 오랫동안 세상에 그의 이름을 외치고 다니시는 것일까.
어쩌면 이것이 어머님 매일의 일과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어머님은 그의 이름을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매일 저리도 곱고 우아하게 차려 입으시고 외출하시는지도 모른다.
가늠할 수 없이 아팠을, 그러나 세월 속에서 굳은살이 되어 버린 상처가 느껴져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어머님이 자리를 떠나신 후 조심스럽게 그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어릴 때에는 자세히 몰랐던 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 그가 이뤄낸 것들, 그의 따뜻한 인간미를 보여주는 일화들. 하지만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의 시간은 멈춰버린지라, 그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는 더 이상 쓰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옛날 이야기로만 남아 색이 바래가고 있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럼에도,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서 그 이름이 불리고 있지 않은가.
어머님의 한 마디에 이렇게 누군가는 그를 길게 회상할 수 있다는 걸 보면, 그의 이름은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이제는 부르지 못하는 그 이름을 타인에게라도 읊으며 살아가고 계시는 어머님이,
혹시라도, 아직도 너무 슬퍼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어머님께 그 이름을 듣게 될 많은 사람들이, 부디 따뜻한 마음으로 함께 그를 떠올려 준다면 더 좋겠다.
* 덧.
먼저 떠나보낸 나의 소중한 사람, 나의 자랑을 그 누군가는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기억해 달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은 마음을 짧은 씬 안에서나마 가슴 저릿하게 잘 표현한 영화가 있다.
배우이자 영화 감독인, 손석구 감독의 '재방송' 이라는 단편 영화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