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들의 말씀이 문득 시 같아서.
우리 약국에 오시는 손님들 중에는, 유난히 귀여우신 할머님들이 몇 분 계신다.
당장 생각나는 몇 분의 할머님을 소개해 보자면,
약국 밖에서는 여장부처럼 성큼성큼 걸어다니시다가, 약국만 들어오시면 갑자기 쪼르르, 정말 말 그대로 아이처럼 쪼르르 투약구로 달려와 인사를 건네시는 박 할머니.
우리 약국 실장님을 5년 넘게 봐 오시면서 본인의 손녀처럼 느끼게 되셨는지, 실장님만 보면 매번 우리 이쁜이, 이쁜이 언니야, 부르며 무장해제된 모습을 보이시다가도 다른 약사, 직원분과 눈이 마주치면 순식간에 새초롬하게 체면을 차리시는 이 할머니.
그렇게 고마울 일도 아닌데 상담해 드릴 때마다 고맙다 고맙다 말씀을 하시면서, 뒤에 계신 손님에게까지 '이 약국이 최고에요', 자랑을 하시며 자리를 떠나시는 김 할머니.
등이 계신다.
할머님들이 약국에서 말씀하시는 표현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외람되지만 정말 귀여우실 때가 있다.
유난히 기억이 생생한 최근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1. 앞서 말한 '쪼르르' 박 할머니. 이비인후과에서 처방 받으신 감기약 중에 '슈도에페드린' 성분이 있었다. 이 약은 교감신경을 흥분시키는 약이다 보니 때때로 가슴 두근거림이나 몽롱함, 약간의 어지러움, 불면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할머니는 이 약을 드신 다음 날, 또 쪼르르 달려오셔서 나를 붙잡고 이야기하셨다.
- 아 그 약 먹고 정말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그 뭐랄까 정말, 밤새 구름 위를 이렇게 걸어다녔다니까... (갑자기 뒤로 한 발짝 물러 나시더니, 구름 위를 걷는 걸음걸이를 흉내내심. 내가 뵌 할머님들 중 귀여움 랭킹 1위를 차지하시는 순간이었다)
2. 위하수가 심해서 고생하시는 장 할머님.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위장병을 앓아 오셨고 그로 인한 괴로움이 심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본인의 그 고통을 매번 해학적으로 얘기하신다. 예를 들면, "아우, 이 놈의 위장이랑 뼈는, 아주 처음부터 틀려먹었어." 하시고서는, 한숨을 쉬시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깔깔 웃으시는 것이다. (처음엔 이걸 같이 웃어야 하나, 어째야 하나 곤란해 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같이 웃는다.)
할머니는 며칠 전 또 위장약을 타러 오셔서 본인의 위장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한참을 토로하셨는데, 할머니의 하소연 속에서 계속 이런 표현이 등장했다.
- 아이구 그냥 이 놈의 명치에 니꾸사꾸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다니까. 니꾸사꾸가.
니꾸사꾸가 뭐지? 추억의 브랜드 니코보코와 퓨전짬뽕집 니뽕내뽕이 라임의 유사성을 내세워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한참 혼란스러웠다. 뭘 알아 들어야 공감을 해 드릴텐데. 일단 끄덕끄덕하며 이야기를 한참을 들어 드린 후, 할머니가 가신 뒤 구글에 빠르게 니꾸사꾸를 검색해 보았다. 아아. 군용 배낭을 말하는 'rucksack(럭색)'이라는 말이 일본어화 된 것이었다. 위하수로 인한 할머니의 괴로움의 크기를, 할머니가 약국을 떠나신 후에야 대략적으로 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다. 명치에 군용 배낭이 달려 있다라.... 어후. 할머니. 그걸 어떻게 참고 계신 거에요.
3. 매번 내게 고맙다 고맙다 하시는, 눈빛이 깊고 고우신 김 할머님. 슬픈 일이지만 요즘 할머니의 기억력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시간은 자꾸만 빠른 속도로 짧아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번 방문 때 나누었던 얘기들을, 다시 오셨을 때에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신다.
하루는 약국이 너무 바빴고, 그 날따라 마음에 미움과 화가 가득한 손님들이 많이 다녀가셔서 나도 그 감정들에 물들고 또 짓눌려 있었다. 그런 날에, 김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친 마음으로 인해 상담이 짧아질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병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뚱해진 표정이 마스크 위로도 비쳤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또 고마워요, 고마워요 연거푸 인사를 해 주시더니, 대화 마지막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남기셨다.
- 그런데 우리 약사 선생님이 바뀌셨나봐요, 저번에 왔을 때에는 아주 상냥한 약사님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기억하셨던 그 때의 나와, 마음에 화가 가득했던 날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 한 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 만큼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정말 기억이 희미하셔서 그렇게 얘기하신 건지, 그 날따라 표정이 어두운 나를 따뜻하게 타이르는 말씀이셨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사실이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할머니의 그 한 마디는 그 이후로도 나를 계속해서 스스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가끔 할머님들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시면 온갖 걱정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다시 또 그런 아이 같으신 모습으로, 또 고운 눈빛으로 나타나시면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님들은 종종 나를 '키 작은 약사', '그 쪼끄만 언니야'(어쩌다 내가 언니인지는 잘 모른다), 등등으로 부르시면서 찾아 주시곤 한다. 그 정겨운 호칭들, 그리고 할머니들의 이런 귀엽고 시적인 표현들, 재치있는 말씀들을 오래오래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님들,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