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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더필즈 Apr 01. 2022

귀여운 할머니들

할머니들의 말씀이 문득 시 같아서.

우리 약국에 오시는 손님들 중에는, 유난히 귀여우신 할머님들이 몇 분 계신다.

당장 생각나는 몇 분의 할머님을 소개해 보자면,

약국 밖에서는 여장부처럼 성큼성큼 걸어다니시다가, 약국만 들어오시면 갑자기 쪼르르, 정말 말 그대로 아이처럼 쪼르르 투약구로 달려와 인사를 건네시는 박 할머니.

우리 약국 실장님을 5년 넘게 봐 오시면서 본인의 손녀처럼 느끼게 되셨는지, 실장님만 보면 매번 우리 이쁜이, 이쁜이 언니야, 부르며 무장해제된 모습을 보이시다가도 다른 약사, 직원분과 눈이 마주치면 순식간에 새초롬하게 체면을 차리시는 이 할머니.

그렇게 고마울 일도 아닌데 상담해 드릴 때마다 고맙다 고맙다 말씀을 하시면서, 뒤에 계신 손님에게까지 '이 약국이 최고에요', 자랑을 하시며 자리를 떠나시는 김 할머니.

등이 계신다.


할머님들이 약국에서 말씀하시는 표현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외람되지만 정말 귀여우실 때가 있다.

유난히 기억이 생생한 최근의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1. 앞서 말한 '쪼르르' 박 할머니. 이비인후과에서 처방 받으신 감기약 중에 '슈도에페드린' 성분이 있었다. 이 약은 교감신경을 흥분시키는 약이다 보니 때때로 가슴 두근거림이나 몽롱함, 약간의 어지러움, 불면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할머니는 이 약을 드신 다음 날, 또 쪼르르 달려오셔서 나를 붙잡고 이야기하셨다.

- 아 그 약 먹고 정말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그 뭐랄까 정말, 밤새 구름 위를 이렇게 걸어다녔다니까... (갑자기 뒤로 한 발짝 물러 나시더니, 구름 위를 걷는 걸음걸이를 흉내내심. 내가 뵌 할머님들 중 귀여움 랭킹 1위를 차지하시는 순간이었다)


2. 위하수가 심해서 고생하시는 장 할머님. 워낙 오랜 기간 동안 위장병을 앓아 오셨고 그로 인한 괴로움이 심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본인의 그 고통을 매번 해학적으로 얘기하신다. 예를 들면, "아우, 이 놈의 위장이랑 뼈는, 아주 처음부터 틀려먹었어." 하시고서는, 한숨을 쉬시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깔깔 웃으시는 것이다. (처음엔 이걸 같이 웃어야 하나, 어째야 하나 곤란해 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같이 웃는다.)

할머니는 며칠 전 또 위장약을 타러 오셔서 본인의 위장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한참을 토로하셨는데, 할머니의 하소연 속에서 계속 이런 표현이 등장했다.

- 아이구 그냥 이 놈의 명치에 니꾸사꾸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다니까. 니꾸사꾸가.


니꾸사꾸가 뭐지? 추억의 브랜드 니코보코와 퓨전짬뽕집 니뽕내뽕이 라임의 유사성을 내세워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한참 혼란스러웠다.  알아 들어야 공감을  드릴텐데. 일단 끄덕끄덕하며 이야기를 한참을 들어 드린 , 할머니가 가신  구글에 빠르게 니꾸사꾸를 검색해 보았다. 아아. 군용 배낭을 말하는 'rucksack(럭색)'이라는 말이 일본어화  것이었다. 위하수로 인한 할머니의 괴로움의 크기를, 할머니가 약국을 떠나신 후에야 대략적으로 짐작이나마   있었다. 명치에 군용 배낭이 달려 있다라.... 어후. 할머니. 그걸 어떻게 참고 계신 거에요.


3. 매번 내게 고맙다 고맙다 하시는, 눈빛이 깊고 고우신 김 할머님. 슬픈 일이지만 요즘 할머니의 기억력이 감당해 낼 수 있는 시간은 자꾸만 빠른 속도로 짧아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번 방문 때 나누었던 얘기들을, 다시 오셨을 때에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신다.

하루는 약국이 너무 바빴고, 그 날따라 마음에 미움과 화가 가득한 손님들이 많이 다녀가셔서 나도 그 감정들에 물들고 또 짓눌려 있었다. 그런 날에, 김 할머니가 오셨다. 할머니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친 마음으로 인해 상담이 짧아질 수 밖에 없었고, 게다가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병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뚱해진 표정이 마스크 위로도 비쳤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또 고마워요, 고마워요 연거푸 인사를 해 주시더니, 대화 마지막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을 한 마디 남기셨다.

- 그런데 우리 약사 선생님이 바뀌셨나봐요, 저번에 왔을 때에는 아주 상냥한 약사님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기억하셨던 그 때의 나와, 마음에 화가 가득했던 날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말씀 한 마디에 갑자기 눈물이 핑 돌 만큼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정말 기억이 희미하셔서 그렇게 얘기하신 건지, 그 날따라 표정이 어두운 나를 따뜻하게 타이르는 말씀이셨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사실이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할머니의 그 한 마디는 그 이후로도 나를 계속해서 스스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가끔 할머님들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시면 온갖 걱정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다시 또 그런 아이 같으신 모습으로, 또 고운 눈빛으로 나타나시면 그제서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머님들은 종종 나를 '키 작은 약사', '그 쪼끄만 언니야'(어쩌다 내가 언니인지는 잘 모른다), 등등으로 부르시면서 찾아 주시곤 한다. 그 정겨운 호칭들, 그리고 할머니들의 이런 귀엽고 시적인 표현들, 재치있는 말씀들을 오래오래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할머님들,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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