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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Jul 01. 2022

#22. Sevilla, Spain.

침묵으로 날려버린 하루.

  어니스트 헤밍웨이 내게 영향을 준 외국 작가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작가이다. 번역된 많은 작품으로도 충분히 그의 필력이 느껴지지만 원서로 읽으면 간결하고 세련된 특유의 문체까지 느낄 수 있어서 그를 왜 최고의 작가라 칭송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사랑한 론다를 떠나며 다시 한번 그의 흔적을 찾아봤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산책길이었다.

헤밍웨이의 산책로, 그의 동상.


낮에 보는 누에보 다리도 특별하다.

  떠나기 전, 나를 한 번 더 붙잡아 두는 풍경. 오랜 시간 견뎌왔을 외로움이 낭만으로 다가왔다. 절벽은 더 이상 내게 끝을 상징하지 않는다.


  이렇게 낭만으로 끝이 나는 하루였다면 좋았을 텐데. 여행은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정확하지 않은 내비게이션을 따라서 도착한 목적지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었다. 결국 목적지의 주변만 배회하고 소통에 난항을 겪으며 렌터카 반납에 시간을 지체했다. 세비야에 도착했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지친 상태가 되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와 나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끝을 맺었다. 장시간 운전으로 지친 그가 잠시 눈을 붙인 사이 나는 밖으로 나와 숙소 근처를 혼자 둘러보았다.

스페인 광장 Plaza de Espana
하필 웨딩촬영 중이라니.

  세비야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걷다 보면 랜드마크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스페인 광장.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물가에 비친 노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빛났다. 김태희가 광고에서 춤을 추던 분수대 앞에서 예쁜 커플이 웨딩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가 더 미워졌다. 다투지 않고 왔더라면 우리도 저런 날이 오겠지 하며 기분 좋은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유치한 감정이 분수대의 물줄기처럼 뿜어져 나왔다.








  2016. 8. 8. MON

  해가 저물자 금세 주위가 어두워졌다. 듬성듬성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꽤나 무거웠다. 그날 저녁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마음이  좋았던 날이었던  같다. 사소한 싸움이었는데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편을 들어서 마음이 매우 상했던  같다. 어쨌든  극적으로 화해하고 우리의 여행은 계속되었지만 소중한 하루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날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의미 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여행의 의미는 이렇듯 감정에 따라 변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감정을 종잡을 수 없어서 하루 하루를 예측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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