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깬 나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지금이 몇 시지?’ 시계를 보니 11시. 밤인지 낮인지. 눈을 감아도 익숙한 두어 걸음. 두꺼운 암막 커튼부터 걷었다. 잠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밤손님은 아닌가 보다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그때 다시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두 번째 벨소리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월패드 쪽으로 다가가 요란한 방문자가 누구인지부터 확인했다. ‘비번 알면서 그냥 들어올 것이지, 매번 하여튼.’ 마뜩잖다가 이내 귀찮기까지 했다. 잠을 깨웠고, 내 공간에 불쑥 들어왔으니까.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자고 있었지? 낮에 자면 밤에 더 못 잔다니까. 말을 안 들어 하여튼.”
영지는 무언가 가득 손에 짊어지고는 주방 쪽으로 잰걸음을 하며 말했다. 늘 그렇듯 에너지가 넘치는 말투에 내 목소리는 이미 갈 곳을 잃었다.
“뭐 먹고살아? 냉장고에 든 게 없냐?”
그녀는 내 웅얼거림 따위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냉장고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잠시 반가움 쪽으로 기울던 마음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정수기에서 찬물과 뜨거운 물을 반반씩 섞어 한 모음 마셨다. 내 눈 끝은 영지를 향해 있었지만 아랑곳없다는 듯 다시 따발따발이다.
“엄마가 언니를 넘 오냐오냐 키워서 이런 거라고. 오십 넘었음 알아서 딱딱!! 어?!”
“야, 나 주부 졸업한 지 이제 1년 차야. 맘대로 살아도 되지 않아? 시엄마, 친정 엄마 잔소리 안 하고, 남편에 자식들도 이제 다 조용한데 너만 시끄러워. 못 살아. 진짜. 넌 오늘 출근 안 해?”
“오늘 토요일이거든.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지?”
‘아, 토요일.’
나는 무심한 듯 주방에 놓인 탁상 달력을 보았다. 따스한 햇살이 무색할 만큼 달력은 겨울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슬쩍 세 장을 넘겼다.
“언니, 약은 좀 들어? 어제도 못 잔 거야?”
냉장고에서 유통기한 지난 식품을 꺼내고, 한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내 쪽을 향해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갱년기에 불면증 정도면 감사한 거 아냐?”
나는 대수롭지도 않은 말을 한다는 식으로 대꾸하고 다시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잠시 스톱 버튼이 눌려진 것처럼 서 있더니 이내 포기한 듯 소파에 가 앉았다. 그리고는 집 안을 구석구석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없이 일어나 청소기를 들고 온 집안을 돌았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나는 영지의 움직임만 지켜보고 있었다. 뒷모습에서 내가 보였다. 나인지 영지인지 모를 사람이 분주히 왔다 갔다 했다.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 나는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영지가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면 밤까지 잤을지도 모른다.
“세수하고 나랑 어디 좀 가자.”
“귀찮아. 너 혼자 가.”
“나 혼자 못 가, 같이 가자.”
영지의 등쌀에 겨우 점퍼 하나만 걸치고 따라나섰다. 4월인데도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바깥바람을 얼마 만에 마주한 건지 잠시 멍하니 섰다. 내가 멍한 꼴을 보지 못하는 영지다. 자외선 차단제라도 바르라며 난리를 치는 통에 영지가 건네주는 스틱형으로 된 녀석을 얼굴에 슬슬 문질렀다. 거울 속에 육십은 족히 되어 보이는 중년 여자가 나를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영지 차에서는 항상 좋은 향이 난다. 시트러스계였던가? 상큼하다. 한 살 차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지는 활력이 넘쳤다. 나는 그런 영지가 늘 부러웠다.
“이 방향제 뭐라 그랬더라?”
“나도 몰라. 한 번에 대량 구매해서, 언니 차량용 방향제 안 쓰잖아? 줄까?”
“아니, 운전도 거의 안 하는데 뭐. 니 차에서 나는 게 좋아. 이 향은.”
영지는 룩미러로 나를 흘끗 쳐다보는 듯했지만, 곧 무심한 듯 운전에만 집중했다. 한참을 우리는 익숙한 음악을 들었다. 아무 말도 없었고, 할 말도 없었다. 허름한 공장 같은 곳에 다다라서야 나는 그곳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여기 뭐야? 너무 험한데? 진실의 방이니?”
“하하하, 언니. 아직 감 안 떨어졌네? 좀 그래라. 이제 우리 언니 같네.”
나는 들은 척 만 척 입구를 향해 걸었다. 영지와 함께 들어선 곳은 조용한 카페였다. 우드와 그린. 내가 좋아하는 조합이다. 용케도 찾았네. 이런데 질색팔색하는 녀석이.
“여기, 괜찮네.”
“끝내주지? 그보다 더 끝내주는 게 있어. 기다려 봐.”
가장자리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카페 주변을 뒤덮은 대나무숲을 바라보았다. 이 진실의 방 같은 건물은 경사진 언덕 가운데 자리 잡은 모양이다. 대나무숲이 나를 빽빽이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위압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안심스러웠다. 초록의 보호자. 카페는 조용했고, 음악은 적당히 울려 내 목소리 데시벨을 신경 쓰지 않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울리고 있었다. 잠시 후, 영지는 쟁반 가득 뭔가를 듬뿍 담아 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다 뭐야?”
“흐흐흐, 여기 이거 봐. 스콘이 죽여줘. 이 집이 스콘 맛집이래.”
나는 영지를 쳐다보았다. ‘나도 잊고 있었는데.’
“다 맛있다기에 종류별로 다 샀어. 남으면 싸 가면 되니까. 커피랑 같이 먹어 보자.”
나는 조용히 커피 잔을 코로 가져갔다. 오랜만이었다. 갓 내린 원두의 향.
“향 좋다.”
“응.”
“언니야.”
“왜?”
“아니다, 스콘 진짜 맛있다.”
고개 숙인 나는 영지의 얼굴을 이마로 읽었다. 영지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내 시간은 5년 전 어디쯤에서 멈춰버렸고, 영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