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그거, 그거 있잖아. 후드 점퍼. 얼마 전에 새로 산 그거 어디 갔지?”
아침마다 다급한 딸아이의 목소리.
“네 방에 있겠지. 걔가 발이 달렸니, 팔이 달렸니. 침대랑 옷장 안에 잘 찾아봐.”
“아, 진짜~~뭐야. 왜 여기 있는 건데! 좀 전까지 없더니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혼자 씩씩거리며 애태우던 점퍼의 지퍼를 급하게 잠그는 소리가 스타카토마냥 들려왔다. 푸다닥거리는 것이 꼭 닭장 속에 풀어놓은 암탉 같이 피식 웃음이 났다. 매일 저 모양이다. 도대체가 바뀌지 않는 건 내 유전자일까? 그이의 유전자일까? 생각을 이어갈 틈도 없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넥타이 핑크 계열로 하나 골라 줘.”
“그건 좀 알아서 해. 나도 출근 준비해야 한단 말이야.”
“에이, 한 번만 골라 주라. 당신이 골라 주면, 하루가 잘 풀려.”
‘뭐래, 이 양반이.’ 이 또한 요즘 반복되는 아침 풍경 중 하나다. 그럼에도 나는 마지못한 척, 귀찮은 척, 넥타이 고르는 데 심혈을 다한다.
“다들 그러다가 내 옆을 떠나. 혼자 큰 것처럼. 자식도 남편도”
정 선배가 며칠 전 나에게 툭 던진 말이 내게도 꽤 긴장감 있게 다가왔었다. 남편의 외도와 아이들의 독립. 나이 오십을 목전에 두던 때에 그녀는 독거 중년이 되었다. 그녀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진정성 있는 충고일지도 모른다.
“정 선배, 나는 그런 날이 빨리 좀 오면 좋겠어.”
농담 반 진담 반. 그녀와 나눈 이야기가 문득 그 아침에 번뜩이며 스쳤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곧 오겠지. 곧 대학생이 되는 딸도, 군대에 가 있는 아들도 언젠간 독립을 할 것이고, 남편? 하,
‘제발 와라, 그날아. 나도 혼자 좀 있어 보자. 그보다 핑크색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갑자기 핑크색 넥타이?’ 나는 몇 개 없는 핑크 계열 넥타이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색으로 하나 골라 주었다.
“오~이거 좋네. 역시, 자기 눈이 최고다.”
괜한 의심이 들 정도로 반색하는 얼굴을 보니 기가 막히다가 얼마 전, 제 나이보다 다섯 살은 더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푸념하던 남편이 떠올랐다. 전업 주부였다면 남편의 나이 듦을 조금은 늦추어줄 수 있었을까?
“핑크 어울린다. 괜찮네.”
'그래, 말 한마디로 퉁 치자.'
‘핑크, 핑크’ 유난히 통통 튀는 단어가 남편에게 신경 써주지 못했던 지나간 죄책감을 쓰나미처럼 몰고 왔다. 고작 핑크색 넥타이 따위가.
차 안엔 잡동사니가 널려 있었다. 집은 깨끗한데 차는 그렇지 못했다. 나 외엔 타지 않는 차.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나만의 공간. 그래서 그곳은 항상 내 마음속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주인은 정리할 생각이 없고, 딱히 그 공간도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목적에 맞는 물건들이 제각각의 자리에서 자기 역할만 해준다면 딱히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차는 단지 이동 수단의 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지러운 차 안은 못 본 척하며 시동을 걸었다. 한숨이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어나왔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선생에게 입을 닫은 아이들과 상담 주간이란 이유로 정해진 질문을 해야 하는 일에 진이 다 빠져 버렸다는 것만 빼면……. 중 2 아이들은 제각각 어깨에 뽕이 가득 차 있다. 어떤 녀석은 드러내고, 어떤 녀석은 애써 감춘다. 그 차이일 뿐이다. 그런 애들에게 지금 너의 마음은 어떻니? 학교생활은 어떻니? 뭐가 되고 싶니? 따위의 구태의연한 질문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긴 하루였다. 마지막 수업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사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애써 가족들에게 티를 내지 않고 있지만, 불면증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수업이 끝나면 병원을 좀 들러볼까. 아이들이 마지막 지문을 읽을 동안 어느 병원을 가야 하나 고민하며 내심 속으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10초가 10분 같이 느껴지던 그때, 진서가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저 지금 조퇴해도 되나요?”
“마지막 시간이야.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무시했다. 이유를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너만 가고 싶니? 나도 가고 싶어.’ 속으로 용심을 부렸다. 뒤돌아서서 가는 아이를 보자 며칠 전 진서와 위 클래스에서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다시 아이를 불러 세우기엔 내 면이 서지 않았다. 별개의 문제다. 상담은 상담이고, 조퇴는 조퇴인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진서는 급한 듯 교실을 빠져나갔다. 위 클래스에서 들었던 그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댔다. 그리고, 내가 했던 대답도.
“아무도 제 얘길 안 들어줘요.”
“그렇지 않아. 선생님이 다 들어줄게.”
결국, 나는 그날 병원을 가지 못했다. 밤새도록 진서의 목소리는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다른 이유로 병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