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길 가다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할 때가 있습니다. 마주 오던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화장품 가게에서 손님 끌기 전략으로 틀어 둔, 철 지난 가요 때문입니다. 멈춰 선 자리에서 화장품 가게를 바라봅니다. 점원이 어서 들어와 소비를 만끽하라는 눈빛을 보냅니다. 물론 살 것도 없고 들어갈 생각도 없습니다. 그렇게 서서, 흥얼거리던 노래가 불러온 기억을 되짚어 볼 뿐입니다.
그때 만났던 사람이 보내준 음악이었는데.. 이천 번쯤 들었던 것 같다.. 든가,
거실에서 가요 프로그램 볼 때 나온 노래였나.. 등 뒤로 지나가던 아버지가 따라 부르셔서 정말 놀랐지.. 라든가.
어디선가 들려온 음악에 잊었던 삶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경험. 나도 그런 적 있어!라고 손 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음악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뮤지션이 되고픈 소년의 노래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코코>는 색다른 의미에서 대단한 영화입니다. 중국 공산당국의 사전 검열을 통과했기 때문이죠. 자국 영화뿐만 아니라 수입 외화에 대한 중국의 검열 기준은 엄격하고 다양합니다. 그중 '귀신이 나오는 영화는 개봉할 수 없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코코>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저승'에서 벌어집니다. 무수한 귀신(?)들이 활약하는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코코>를 본 중국의 관계 당국은 폭풍 감동을 인민 모두와 나누기 위해 파격적으로 개봉 허가를 내립니다.
이 같은 결정은 멕시코의 전통 명절인 '죽은 자의 날'에 행해지는 의식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제사'와 무척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떠난 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지구촌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음식과 예절을 대접하는 의식은, 그들을 기억함과 동시에 '나는 (적어도 가족에게) 잊히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의 발현일지도 모릅니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같은 본질을 길어 올리는 것. <코코>가 일궈낸 사건(?)은 그런 의미로 다가옵니다.
‘성장’은 픽사의 오랜 탐구 영역입니다. 아무리 써먹어도 질리지 않는 이유는 인류 공통의 경험담이자 관심사이기 때문이겠죠. 각자 사연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인간이 태어나면 몸과 마음이 자랍니다. 그 과정에서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등의 관계를 경험하며 자기 존재를 확인합니다. 앞서 문화는 달라도 그 속에 담긴 공통된 마음을 건드리듯, 픽사의 흥행 공식은 배경과 시대를 넘나들어도, 본질 자체는 대동소이한 이야기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익숙한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재탕 삼탕 하면 식상하기 마련. 단순하고 보편적인 이야기에 강력한 소재를 하나씩 덧붙이는 것이 픽사의 주특기입니다. <코코>에서는 '음악'입니다. 그것도 흥이 절로 나는 동시에 아련한 감성까지 건드리는 멕시코 음악이 자리에 앉은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듭니다.
뮤지션이 되고 싶은 소년 미구엘. 하지만 기타 줄 튕기고 목청껏 노래 불러봤자 쌀 한 톨 안 나오는 게 현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미구엘은 꿈을 이루려다 저승길(!)에 접어듭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모험을 이어가는 미구엘. 산 자가 죽은 자의 세상으로 건너갔으니, 거기 머물면 죽는 것이고 돌아와야 살 수 있는 상황.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
동트는 태양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 앞에 닭똥 같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는 미구엘. 죽고 싶지 않아. 가무잡잡한 소년의 얼굴 너머, 픽사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때 이른 죽음보다 힘들어도 사는 게 좋은 이유는 소중한 이들 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미구엘은 자신의 꿈을 방해해서 밉기만 했던 가족들의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픽사는 자신들의 공식을 완성합니다. 이어서 또박또박 적은 모범 답안에 준비했던 비장의 무기, '음악'을 덧붙입니다.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정신과 의사 앞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서 스무고개 하는 것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것은 바로 음악입니다. 뇌리에 인상 깊게 저장된 음악은 이성과 감성, 영상과 소리, 심지어 무드까지 총체적으로 순식간에 되살려내는 엄청난 힘을 가졌습니다. 생생하게.
미구엘이 노래합니다. 당신을 사랑한 사람이 있었노라고. 소년의 노래에 우린 잠시 잊고 지냈던 사실을 기억합니다. 밥 먹다 말고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물으시는 아버지 잔소리와 이른 아침마다 야멸차게 잠을 깨우시던 어머니 호통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도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코코>의 음악이 불러온 것은 '추억'이 아니라 '기억'입니다. 지나간 시간과 감정을 곱씹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 순간을 살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우릴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서로를 잊지 말고 주고받은 사랑을 기억할 것. 살아서도, 죽어서도. 비단 가족뿐만 아니라 소중한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겠지요.
기억을 되살릴 음악 한 구절이 있다면,
가만히 흥얼흥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음악은 기억을 불러내 마음과 마음을 잇고 사랑을 일깨웁니다. 그리고 소년과 우리는 한 뼘 자랍니다.
당연한 소리를 이토록 황홀하게 풀어내는 솜씨. '참 잘했어요' 도장을 꾹 찍어주고 싶은 애니메이션.
<코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