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릴 쫓는 죽음의 그림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 도저히 떨쳐 낼 수 없는 죽음의 추적에서 우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1980년, 텍사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이자 지금은 트레일러에 사는 가난한 신세 루엘린. 그는 취미로 사냥하러 나갔다가 마약 거래가 틀어져 카르텔 조직원들이 서로 죽고 죽인 현장에 다다릅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아 갈증을 호소하는 남자를 애써 무시한 루엘린은 현장 근처에서 커다란 돈가방을 발견합니다. 이거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돈가방을 챙겨 집에 돌아왔지만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루엘린. 내면의 양심을 외면하지 못한 그는 물을 가득 채운 물통을 들고 다시 현장에 갑니다. 마침 현장에 온 카르텔 조직원들에게 루엘린이 발각되며 도주와 추격이 시작되고, 보안관 벨과 킬러 안톤 시거가 사건에 개입하면서 피가 낭자한 폭력은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이 이어집니다.
연출자 중 조엘 코엔은 인터뷰에서 원작 소설의 주제를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라고 요약했습니다. 영화는 그의 말처럼 갈수록 세상이 나빠지는 가운데 아무것도 새로울 건 없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애당초 한 줄기 희망도 없었던 세상에 새로운 삶의 의미 따위,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필름 누아르일 것입니다. 범죄와 폭력의 세계를 주로 다루는 필름 누아르는 비정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의 종착역이 비록 죽음일지라도 묵묵히 걷는 인물을 통해 비장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게 특징이죠.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인물들은 열 마디 말 대신 폭력을 주고받습니다. 대부분의 결말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갖은 애를 다 써서 살아남아 봤자 별 거 없다는 식의 필름 누아르 공식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여지없이 적용됩니다.
이 영화엔 음악조차 거의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위기를 고조시키고 감정을 뒤흔드는 음악 대신, 러닝타임 내내 흐르는 불안한 적막과 불시에 그것을 깨버리는 소리(이를테면 캐틀건에서 발사되어 사람을 부지불식 간에 죽여버리는 압축 공기 소리)가 관객의 숨통을 쥐고 놔주질 않습니다.
극 중 인물 중 딱히 주인공을 꼽기도 어렵습니다. 던져진 이야기에서 각자 맡은 몫을 다할 뿐이죠. 모두 연기파로 이름난 배우들은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표현합니다.
관찰자인 보안관 벨 역할의 토미 리 존스는 실제 텍사스 출신으로, 가공할 범죄를 지켜보는 마음을 영화 속 풍경처럼 메마르고 무력한 얼굴로 드러냅니다. '노인'인 그는 나이가 들면 세상과 삶에 대해 좀 더 알게 될 거라고 믿었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 없는 사건 끝에 허무함, 공포를 느끼는 보안관 벨. 그의 얼굴을 길게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이야기의 주제를 갈무리합니다.
조쉬 브롤린이 맡은 도망자 루엘린은 일면 쿨해 보입니다. 거대한 행운(돈가방) 이면에 숨겨진 치명적인 위험(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나마 원작 소설에 '온갖 바보에 관한 이야기가 나를 두고 하는 말이로군'하며 자조하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시시각각 덮쳐 오는 위기에 뚝심 있게 저항하는 루엘린. 조쉬 브롤린처럼 무게감 있는 배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영화가 엉망이 됐을 거라고 말한 조엘 코엔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세상에 둥둥 떠 다니는 '불운'을 인간의 형상으로 빚으면 이렇지 않을까 싶게 생긴 살인마 안톤 시거. 하비에르 바르뎀은 꿈에서조차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으로 (관객을 포함한) 그를 만나는 모든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심지어 도로 가드레일 위에 앉은 새까지 총으로 쏴버리는 안톤 시거를 한번 마주친 이는 영화에 다시 등장하지 못합니다. 사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총기류를 무서워하고 창백한 얼굴을 만들기 위해 핑크색 파라솔을 쓰고 다니는 등 섬세하고 별난 구석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영화 속 그는 납득할 수 없는 자기만의 원칙으로 상대방의 심신을 억누르는 악몽 그 자체로 등장합니다.
배우들의 앙상블을 정교하고 장엄하게 담아낸 로저 디킨스의 촬영. 모든 걸 아울러 완벽하게 통제하는 코엔 형제의 연출. 관객은 거장들이 공들여 만들어 낸 지옥의 풍경을 두 시간 남짓 경험하게 됩니다.
네가 따르는 규칙이 널 이 꼴로 만들었다면,
그 규칙들이 다 무슨 소용이지?
죽음은 불쑥 찾아옵니다. 우린 아무 잘못도 안 했습니다. 오히려 남들처럼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 유명한 주유소 씬에서, 주인아저씨의 죄가 있다면 안톤 시거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 것뿐입니다. 직업이 킬러인 안톤 시거에게 자신을 관찰한 사람은 향후 보안관의 탐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위협 요소입니다. 죽여버릴까. 그의 마음에 살의가 고개를 든 순간 텍사스의 한적한 주유소는 긴장감으로 가득 찹니다. 주인아저씨는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안톤 시거에게 위압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동전의 앞뒷면을 맞추라는 기괴한 강요로부터 도망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말릴 새도 없이 동전은 던져졌습니다. 루엘린이 돈가방을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죽음을 언제 맞게 될지는 그저 운에 달렸습니다.
오프닝 씬의 나레이션에서 보안관 벨이 말합니다. 열네 살짜리 소녀를 죽인 소년을 가스실로 보낸 일에 대해서. 자신이 지옥에 갈 것임을 안다는 소년은 아무나 죽일 마음으로 소녀를 해쳤다고 합니다. 엔딩 씬의 보안관 벨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횃불이 그저 꿈에나 있었던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솔직히, 영화 안에서는 어떤 답도 찾을 수 없습니다. 원작 소설을 찾아 결말까지 읽어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코엔 형제가 원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방식은 소설의 문체마저 고스란히 영상 화법으로 치환한 <남한산성>의 그것과 닮았습니다. 덧붙인 의견은 없습니다. 관객은 원작으로부터 출발한 이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원작 속 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이 감독(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세상은 아직 좋은 곳이니 작게나마 기댈 곳을 찾아보자고 말하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그런 영화가 아닙니다. 불가해한 세상을 똑바로 마주 보고 그 가혹함을 절감하게 만듭니다.
영화가 끝나면 허무함이 밀물처럼 몰려오지만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린 아직 살아있다는 것.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삶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말해주지 않은 답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봅니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아득한 절망에 주저 앉지 말고 뭐라도 할 것인가. 영화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무기력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소리없이 다가 올 운명을 그저 기다릴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쩌면 해답을 고민하는 과정이 영화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이자 원작자, 그리고 감독(들)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메마른 바람이 부는 벌판에 선 듯한 기분이 드는 이야기.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 어떻게 발 디뎌야 할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