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력>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웰컴 투 연상호 월드
이번엔 초능력이다!
<부산행>에 이은 연상호 감독의 차기작이 개봉했습니다. 전작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소재인 '좀비'를 내세워 재미 요소를 적절히 버무린 영화였지요. 제법 규모감 있는 스크린 데뷔작에서 경제적인 연출을 선보인 연상호 감독. 특수한 소재/장르를 경제적이고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그의 솜씨가 차기작에도 여전할지, 많은 관객들의 기대가 컸습니다.
이번 영화는 다름 아닌 슈퍼 히어로물입니다. 전 지구적 유행을 이끌고 있지만 한국 영화에선 만나보기 어려웠던 초능력 영웅들. 영화로 구현하려면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들기도 하거니와, 설득력 있는 영웅 캐릭터를 만들어 내기 쉽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창작자와 관객 모두 기다려왔던 슈퍼 히어로 장르에 호기롭게 도전한 연상호 감독.
개봉 후 첫 주말이 지난 현재 <염력>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혹평이 많습니다. 과연 <염력>은 점입가경으로 치닫는 비난처럼 '역대급 망작'일까요?
우선 가장 많은 비난을 얻고 있는 CG는 <우뢰매>와 비교당하며 비웃음 살 정도는 아닙니다. 막대한 예산과 시간을 투자하는 할리우드의 고퀄리티 CG에 비해 어색하지만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수준입니다. 질감 표현이나 와이어 액션에서 보이는 기술적 허점이 관람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CG를 활용하는 방식이 아쉬웠습니다. CG는 거들뿐 이야기 흐름을 방해하면 안 되는데, <염력>의 CG는 가짜 티가 나서 문제라기보다 이야기의 맥락을 방해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인공인 석헌(류승룡)이 딸 루미(심은경) 앞에서 넥타이로 염력을 시연하는 장면, 결말부에서 석헌이 궁지에 몰린 철거민을 대신해 희생하고자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전자는 앞뒤 상황에 맞지 않는 코미디 때문에 웃음 대신 열악한 CG만 드러났고, 후자는 철거민의 사투가 아버지의 희생으로 급 종결되는 흐름이 난데없이 느껴졌습니다.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슈퍼 히어로의 탄생을 간단하고 위트 있게 넘기는 초반부는 좋습니다. 약숫물을 마셨더니 초능력이 생겼다는 설정이나 사회의 여러 문제(재개발, 갑질, 소외 계층)를 다루는 시선은 매우 '한국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인물과 이야기 모두 물 건너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온갖 건물을 때려 부수며 싸우는 외제 슈퍼 히어로물 보다 친밀하게 다가옵니다. 한국에서도 그럴싸한 슈퍼 히어로물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염력>은 장르적 신호탄으로 제 몫을 합니다.
하지만 슈퍼 히어로물에 필연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이야기가 부실합니다. 슈퍼 히어로는 평범한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의 비범한 능력을 남을 위해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뜻합니다. 즉 보통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닥쳤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슈퍼 히어로가 탄생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능력이 생기면 자신을 위해 사용하길 원합니다. 그러다 어떤 깨달음을 얻어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능력을 사용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진정한 슈퍼 히어로로 거듭나죠. 배트맨이 (쿨하게 자신의 초능력이라 일컬은) 그 많은 재산을 자신의 쾌락을 얻는데 쓰지 않고 사회 정의를 위해 퍼붓는 모습에 우리가 존경심과 애정을 느끼며 영웅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배트맨은 부모님이 괴한의 손에 죽는 모습을 본 순간, 그런 비극을 만든 고담의 부패와 악에 맞서 싸우기로 마음 먹습니다. 새로운 시리즈 마다 악당과 배트맨 개인의 딜레마는 바뀔지언정,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기로 한 사건의 내용과 기저에 깔린 뚜렷한 주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염력> 주인공 석헌에게 닥친 문제는 무엇인가?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떠안게 된 빚? 어쩔 수 없이 이혼한 뒤 악화된 가족 관계? 정작 영화 속 석헌을 보면 그에게 초능력이 생겨야 할 이유가 뭔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는 별 걱정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처럼 보이며, 루미를 만난 이후에도 딱히 달라지지 않습니다. 초능력은 그에게 아무 이유 없이, 그야말로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석헌은 "죽은 아내가 아빠 노릇 한번 잘 해보라고 (초능력을) 줬나 보다"고 말합니다. 그럼 석헌이 딸과 화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뤄야 할 텐데 영화는 철거민 문제로 대표되는 사회상을 비슷한 비중으로 다루며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초능력은 석헌이 아니라 루미에게 생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또한 석헌이 자신의 초능력을 타인(철거민)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는 계기가 흐릿합니다. 그의 비극적 과거로부터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타인에게 확장되는 과정이 섬세하지 못합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석헌의 마음이 변화하는 과정이 그려져야 할 자리를 철거민의 절규와 사회적 부조리가 대신합니다. 홍상무(정유미)의 기괴한 갑질이 석헌을 분노하게 했을지언정 소시민인 석헌이 맞서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기엔 부족해보입니다. 공권력마저 소시민을 탄압하는 모습이 석헌을 투사로 만들었다기에 그는 스스로 이 싸움은 '이길 수 없다'고 말했고, 결과적으로 그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싸움에 나선 까닭이 루미를 위해서라면 굳이 한발 더 나아가 철거민을 대신해 전과자가 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갑작스레 결의를 다진 석헌이 딸에게 말없이 미소 지을 때 관객은 그 의미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 없이 두둥실 하늘로 날아오른 그가 경찰에게 자진 체포당할 때 관객들은 감동 대신 황망함을 느낍니다. 왜.. 저래?
감정을 들썩이는 건 결국 ‘이야기’.
<염력>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이야기 중 하나만 제대로 다뤘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봅니다. 우연히 초능력을 얻게 된 남자 이야기 또는 한국 사회의 폐부인 재개발(더 좁히면 '용산 참사') 문제. 그랬다면 관객은 아빠의 뜨거운 부성애를 응원할지 처절한 현실에 함께 울어야 할지 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둘 다 욕심이 났다면 그것을 매끄럽게 엮지 못한 이야기의 미흡함이 <염력>이 남긴 가장 큰 아쉬움이겠지요.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한 관객들이 CG를 트집 잡기 시작하면서 SNS의 입소문은 이미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여러모로 아쉽긴 해도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영화가 아닌 만큼, 망작이라 일컫는 관객의 실망은 개봉 전 기대감의 역설일지도 모릅니다.
영화가 소재로 삼은 초능력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화해를 가로막는 해묵은 감정을 치우고, 악당들을 들었다 놨다 하며 정의 앞에 멈춰있던 세상을 들썩이게 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힘.
흥미로운 소재와 좋은 제목으로 한국산 슈퍼 히어로물의 초석을 놓았지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기엔 미진했던 이야기.
<염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