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聖君)의 조건

<블랙 팬서>

by bittersweet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특별한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근현대사로부터 현재 진행형인 여러 사건을 겪으며 국가 지도자 또는 사회적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몸소 체험했고, 지금도 그 답을 구하는 과정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와칸다의 왕자 티찰라. 그의 왕위 계승 과정을 그린 <블랙 팬서>는 슈퍼 히어로 장르에 첩보 액션을 버무린 모습으로 우릴 찾아왔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장르로 다루는 진정한 지도자의 탄생 스토리.

왕가 적통의 핏줄에 뛰어난 신체 능력, 영민한 두뇌, 너그러운 심성을 겸비한 티찰라가 왕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일이 쉽게 풀리면 재미없기 마련.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기까지 그를 연단하는 사건이 줄을 잇습니다.


왕이 되기까지 꽃길만 걷는 것은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티찰라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전통으로 이어진 즉위식에서 왕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여러 부족이 모여 이룩한 국가 와칸다에서 왕이 되려면 (마치 간접 선거처럼) 모든 부족 대표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의의가 있는 부족은 왕위 계승자에게 대결을 신청할 수 있지요. 이 대결에 <블랙 팬서>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설정이 등장합니다. 첫째, 왕족에게만 허락된 특수한 능력을 지우고 대결에 임할 것. 둘째, 대결은 죽음 또는 항복으로만 승부가 갈린다.

핏줄이나 초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대표할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서 공정한 대결을 펼치는 것. 자신의 모든 것(목숨)을 걸고 싸운 만큼 승부 결과에 불복해서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규칙의 의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선거에 시사하는 바가 크게 느껴집니다.

영화에서는 왕위를 놓고 두 번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주인공 티찰라는 두 번 모두 정정당당한 태도로 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대적하는 상대와 관객의 지지를 이끌어냅니다.


특권과 반칙 없는 맨몸 승부


신념을 잃지 말고


왕위에 오르는 길은 험난한 법.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선왕(先王)의 과오로 티찰라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들어서자 와칸다를 비롯한 전 세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영적 환상 속에서 만난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는 과거 자신의 선택이 와칸다(국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티찰라는 단호한 어조로 아버지에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보기 드문 일인지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도.

티찰라는 선대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고통스러운 삶의 세계로 돌아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잊지 않은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 티찰라는 진정한 지도자(영웅)로 거듭납니다.


와칸다 국왕의 또다른 이름 '블랙 팬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도자는 그 자리에 오른 과정보다 어떤 일들을 해냈는지 이후 행적으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티찰라는 그동안 숨겨왔던 와칸다의 부(富)와 자원, 첨단 기술을 공개해서 타국과 교류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자신의 동족(흑인)을 포함한 소외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와칸다의 새로운 국왕이 된 티찰라의 결정은 날이 갈수록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분열과 갈등이 심해지는 세상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그것은, 가진 것의 많고 적음을 떠나 서로 이해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아닐까요.


MCU 최초의 블랙 히어로



현명한 자는 다리를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벽을 세운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루려니 <블랙 팬서>는 이전 마블 영화보다 분위기가 사뭇 진지합니다. 전작(<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 <크리드>)에서 주제에 대한 진지한 시선을 세련된 감각으로 풀어냈던 라이언 쿠글러 감독. 그의 장점은 <블랙 펜서>로 고스란히 이어졌지만, <아이언 맨>에서 시작해 최근 <토르:라그나로크>에서 정점에 오른 유머감각을 기대했다면 당황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웃음기가 빠진 자리가 허전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기존 마블 영화에서 등장한 이들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사연과 감정을 가진 악당이 유머의 빈자리를 채웁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과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춘 마이클 B. 조던은 티찰라의 최대 적수로 등장해 화려한 액션부터 절절한 감정 연기까지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드라마틱한 악당으로 열연한 마이클 B. 조던(킬몽거役)


'역대 마블 영화 중 최고'라는 홍보 문구가 의미심장했던 <블랙 팬서>. 웃고 즐기기에 다소 시리어스 하지만, 또 한 명의 진정한 영웅(지도자)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기엔 충분해 보입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를 보며 우리가 사는 세상과 지도자(리더)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면, 값어치 있는 보너스 아닐까요?

이제 <어벤져스:인피니티 워>를 기다릴 일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