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드 리버>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어두운 밤 설원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소녀가 등장합니다. 영하 10도를 밑도는 추위에 맨발로 달리던 소녀는 끝내 눈밭에 엎어져 피눈물을 흘리며 흐느낍니다. 여긴 어디이고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윈드 리버는 미국 와이오밍주의 산맥 이름입니다.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 근방에는 강제 이주된 인디언의 후손들이 광활한 황무지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가진 걸 빼앗기고 차별받는 이들의 슬픈 운명. 영화는 그곳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과 수사를 위해 파견된 신참 FBI 요원의 시선을 통해 소외된 이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조명합니다.
소녀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것은 야생동물 사냥꾼 코리입니다. 지역 주민의 가축을 잡아먹는 포식동물을 사냥하는 코리. 백인인 그를 역차별하는 인디언들도 있지만 알고 보면 그도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억울한 운명을 타고 태어난 인디언들에게조차 따가운 눈총을 받는 백인인 코리는 그런 면에서 더 고립되고 외로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겨울이 되면 지평선까지 눈으로 뒤덮이는 곳. 시대 발전에 뒤쳐진 환경은 고요한 반면 허전해 보입니다. 먹고살기 위해 사냥감을 찾아 드넓은 대지를 헤매는 것은 짐승이나 코리나 마찬가지. 그 외에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이는 풍경은 외지인의 눈에 평온해 보일지 몰라도 그게 삶의 전부인 그들에게는 지루할 뿐입니다.
북적이는 도시에 나가 살면 좀 더 나을까요. 코리의 아내도, 죽은 소녀도, 소녀의 오빠도 새로운 삶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시선은 회의적입니다. 코리의 아내가 새로 일자리를 구한 도시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나 떠돌이 용병이었던 죽은 소녀의 애인은 도시보다 한적한 곳에서 사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소녀의 오빠는 도시로 나가 대학까지 다녔지만 지금은 돌아와 마약중독자들과 어울리는 신세.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삶에 딜레마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곳의 삶은 지리멸렬하지만 도시로 나가봤자 힘든 건 마찬가지. 하지만 아직 피지 못한 꽃이 세상을 꿈꾸듯 소녀는 눈 덮인 땅과 지루함이 전부인 고향을 떠나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습니다.
소녀는 죽었습니다. 경찰 인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역에 FBI 요원 제인이 파견됩니다. 코리의 눈에 죽은 소녀와 나이 때가 비슷해 보이는 제인은 신참 티를 팍팍 냅니다. 처음 맡은 사건에 열의를 보이는 그녀가 할 줄 아는 건 별로 없어 보입니다. 보다 못해 도와주는 코리에게 내친김에 수사에 협조하라고 요청하는 제인. 당돌한 그녀의 모습에 요청을 수락한 코리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 내심 타오르는 분노가 엿보입니다.
이제부터 영화는 코리와 동행하는 제인의 시점으로 윈드 리버 지역의 생활상과 열악함을 보여줍니다. 소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들의 가족은 어떤 아픔을 가까스로 견디고 있는지, 누가 소녀를 왜 죽였는지 알아가며 제인 그리고 관객은 비정한 세상에 희생된 이들과 그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합니다.
범죄에 맞서고, 생활고를 견디고, 불공평한 세상에 저항해보지만 결국 제자리인 사람들. 세상과 싸우길 포기하고 그런 운명을 타고 태어난 자신과 싸울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은 그래서 더 끔찍합니다.
조금씩 환경에 익숙해지며 수사에 박차를 가하는 제인과 함께 관객도 최초의 충격과 이어지는 분노를 안고 사건이 해결되길 응원합니다. 하지만 범인을 검거하는 것이 비극을 매듭짓는 해결책일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죽은 소녀는 공교롭게도 코리가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딸과 절친이었던 소녀. 코리의 딸은 몇 해 전 누군가에게 겁탈당하고 죽은 채 발견되었으나 현재까지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딸과 같은 이유로 죽었음을 알아채는 코리. 미결로 남은 딸의 죽음으로부터 지금껏 응어리진 분노를 안고 살아온 코리는 처음부터 이 사건의 해결책을 정해두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에게 죽은 소녀의 아버지가 같은 마음을 내비치자 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합니다. 놈이 선 그 자리에서.
코리의 직업은 사냥꾼. 생존을 위해 가축을 위협하는 포식동물보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남을 해치는 인간들이 더 나쁩니다. 코리가 겨눈 라이플 총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관객은 일찌감치 알 수 있습니다.
<윈드 리버>의 장르를 구분하자면 범죄 스릴러이겠지만, 그 아래 서부극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험난한 세상을 피땀 흘려 살아내는 이들의 마을. 외지인이 침입해 그들의 삶을 강탈하면 주인공이 반드시 되갚아주는 서부극의 공식. 인면수심의 범죄 앞에 법은 낭만적인 환상에 불과합니다.
공간적 배경이나 인물들의 삶, 사건 설정 모두 서부극과 닮은 <윈드 리버>는 딸을 잃은 사냥꾼이 또 다른 외지인의 만행을 단죄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비정한 세상을 처음 경험하는 법 집행자의 눈으로 그 과정을 목격하는 방식이지요.
클라이막스에서 (개인적인 취향으로) 최근에 본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은 액션씬이 벌어집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서부극 스타일 액션이 극사실적으로 그려지며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합니다.
범인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한 코리와 제인. 수사 과정을 거치며 피해자의 고통을 깊이 공감한 제인은 눈물을 흘립니다. (마치 아버지처럼) 힘든 과정을 잘 해냈다고 그녀를 다독여주는 코리. 이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를 말해줍니다.
여기선 살아남거나 당하거나, 둘 중 하나.
<윈드 리버>의 감독 테일러 쉐리던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디언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계기 삼아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와 사람들을 이해하고 영화에 진정성 있는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와이오밍주에서 육 개월 간 살며 시나리오를 썼다고 합니다. 그의 노력과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영화는 제70회 깐느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하며 성과를 이뤘습니다.
<윈드 리버>로 군더더기 없는 연출을 선보인 테일러 쉐리던. <시카리오>와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가로도 유명한 그의 차기작이 더욱 기대됩니다.
선 굵은 이야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
각박한 세상을 배경으로 소외된 이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
<윈드 리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