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 빌보드>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집니다. 그중에는 감당하기 힘든 순간도 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내 잘못도 아닌데 그 이유조차 모르는 일들입니다. 이 땅에 가진 것 없이 태어난 건 우리 의도가 아니며, 소중한 사람이 느닷없이 곁을 떠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런 일이 닥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도대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납득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자조와 한탄이 무성한 시대입니다. 금수저/흙수저 논란, 인종/이민자 차별, 종교/이념 갈등. 균열과 증오가 불러온 폭력이 난무하는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묻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기 딸을 잃은 엄마가 있습니다. 범인을 아직 잡지 못한 채 수개월이 흘렀습니다. 엄마와 딸의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서로 영원히 사라지길 바란 것은 아닙니다. 흔한 가족 간의 다툼이 전부였습니다. 엄마는 '저런 게 내 뱃속에서 나왔다니'. 딸은 '난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거야?' 정도로.
딸은 강간 살해당했습니다. 허송세월만 보내는 경찰 때문에 응어리진 증오를 고스란히 떠안은 엄마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집니다. 억장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녹는 감정이 엄마 역할을 맡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묻어납니다.
영화의 배경은 이른바 깡촌(?)입니다. 한적한 시골의 무기력한 풍경에 시뻘건 광고판이 연달아 세 개나 등장합니다.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데다 수사 책임자(경찰서장)의 실명까지 거론된 광고 문구. 겉으론 평화로워 보였던 마을이 엄마가 내건 광고판 때문에 들썩이기 시작합니다. 광고에 지목된 경찰서장은 물론이고 미국 남부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으로 무장한 경찰들, 알음알음 서로 다 아는 동네 사람들. 슬슬 편이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평형 상태가 깨지면 사람들은 그 이유와 책임질 사람을 찾기 마련. 사람들의 이목은 엄마에게 집중됩니다. 예상과 달리 여유로 일관하는 엄마의 태토가 불만인 주민들은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대체 왜 저런 광고판을 세워서 이 사달을 내는 거지? 기삿거리를 발견한 언론의 득달같이 달려와 광고판을 배경으로 엄마의 사연을 실어 나릅니다. TV 앞에 앉은 사람들은 광고판을 보며 인상을 찌푸립니다. 모두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으로, 모든 게 정상적이었던(?) 상태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엄마의 강단은 보통이 아닙니다. 그녀를 대놓고 어쩌지 못한 사람들은 그녀와 같은 편, 그러니까 자신들의 적으로 몰아갈 사람을 찾기 시작합니다. 화는 풀어야 하니까요.
광고판을 세우는데 관련된 사람부터 엄마의 지인까지 역공의 대상이 됩니다. 그녀를 왜 도운 거지? 그런 짓은 그만두라고 해. 말로 안 되면 주먹이 뒤따릅니다. 주먹으로 안 되면 더 세게, 더 가혹하게! 그럴수록 엄마의 의지는 불타오르고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서로를 향한 공격이 점점 더 심해지는 이유는 어느 한쪽이 그것을 멈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 억울하기 때문이지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최초의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고 대화 대신 선택한 폭력은 더 강력한 폭력을 낳습니다. 그 세기가 점점 더 강해질수록 상처받는 이들도 많아집니다.
여기서 잠깐.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사람들은 각자 어떤 사람들일까요? 실상 잘못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엄마,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가장, 비루한 모습으로 엄마에게 얹혀사는 아들.. 반면 그들은 가정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대신 씩씩하게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고, 지역 사회에서 평판 좋고 가정에 충실한 경찰서장이기도 하며, 머리는 좀 나쁘지만 형사가 되고픈 말단 경찰이기도 합니다. 서로 욕하고 때리고 불 지른 사람들은 알고 보면 어울려 살아가던 이웃들입니다.
죄인은 딸을 겁탈하고 죽인 범인 뿐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고통이 닥칠 때, 그래서 내면에 쌓인 분노를 풀 길이 없을 때, 공격의 방향은 '옆'을 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의 빈부격차는 내 이웃의 잘못이 아닙니다. 피부색이 다른 것은 내 친구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린 정말 잘못한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이웃과 친구를 적으로 착각합니다. 이 슬픈 분노와 복수의 회전은 누가,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용서(혹은 인내)는 분노의 시발점이었던 엄마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녀는 더 이상의 갈등과 폭력은 자신이 원하던 게 아니란 걸 깨닫습니다. 마음속 불길을 참아낸 그녀의 의지는 폭력을 멈추는 단초가 됩니다.
폭력이 전염되는 것처럼 사랑도 그렇습니다. 화해의 손길은 타인의 감정을 움직입니다. 감동받은 상대는 더 큰 희생으로 보답합니다. 폭력으로 생채기 난 세상은 더디게,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갑니다.
세상만사 쉬운 일은 없다지요. 딸을 죽인 범인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고, 엄마의 분노는 붙박인 광고판처럼 제자리입니다. 이웃끼리 갈등하며 생긴 앙금도 언제 풀릴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끼리 싸우는 게 의미 없는 일이란 걸 안 이상 생각해볼 일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오랜 시간이 필요해도 나아가며 고민해 볼 일입니다. 풍진 세상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예술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종합예술매체'라고 하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선명하게 그려내는 영화를 볼 때 그 예술적 성취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관객으로서 희열을 느낍니다.
먹고 살기 팍팍하다는 말이 자주 들리는 요즘, 세계 곳곳에서 분열과 갈등이 고조되는 이 시대, 작은 마을에 사는 볼품없는 사람들로 지구적 화두를 너무나 적절하게 그려낸 영화가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아울러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쓰리 빌보드>의 주인공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 찌질 코미디와 감동 연기의 진수로 남우조연상을 받은 샘 록웰의 연기를 즐길 수 있는 기회는 보너스입니다. (그 외에도 경찰서장 역할을 맡은 우디 해럴슨과 낯익은 배우들의 멋진 연기로 가득!)
2018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
벌써 만난 올해의 영화.
<쓰리 빌보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