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들어온 평등의 바람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김대건 신부가 지정되었다. 유네스코는 평화의 이상과 문화 간의 대화와 이해, 관용의 가치 증진을 위해 애쓴 역사적 인물과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해 유네스코 기념 해를 지정하고 있는데, 2021년에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과 더불어 김대건 신부가 그 주인공이 되었다. 유네스코는 김대건 신부의 삶과 업적이 유네스코가 추구하는 이념과 부합한다는 점을 들어 세계기념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고,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다산 정약용,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한데 이어서 세 번째로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선정되었다.
천주교를 박해하고 금지하던 조선에서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고 묻는 질문에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당당히 대답한 25살 청년 김대건의 삶은 어떠하였을까? 한 번뿐인 젊음을 바쳐 신학을 공부하여 사제가 되어 박해받고 고통받았던 조선의 천주교인들을 열혈 하게 사랑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오늘날 충청남도 당진시 솔뫼에서 태어났다. 김대건의 부모님은 일찍이 신앙을 접하였고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교우촌’에 살고 있었지만 천주교에 대한 감시와 탄압으로 고향을 떠나 용인 한덕골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대건은 16살에 조선에 몰래 입국한 모방 신부의 눈에 띄어 사제가 되는 길을 걷는 ‘신학생’에 선발되었고, 최양업, 최방제 두 동료와 함께 1836년부터 모방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천주교 박해가 극심해지자 좀 더 안전한 곳에서 교육받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부모님을 떠나 낯선 땅에서 공부하고, 동료 신학생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죽는 슬픔을 겪지만, 김대건은 포기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렇게 공부하던 중, 김대건은 외국 선교사들에게 믿음직하고 신심이 깊은 사람으로 인정받아 1844년 성직자가 되는 첫 번째 단계인 부제서품을 받게 된다. 조선인 최초로 성직자가 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 선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1845년 1월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1차로 조선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다. 조선에 입국한 김대건은 서울 석정동에 교리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 양성을 위한 집을 마련했고, “조선전도”라는 지도를 만들어 선교사들의 안전한 입국을 위해 힘썼다. 조선전도는 이후에 유럽 국가에게 조선을 알리게 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김대건은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순교자들의 행적을 알렸고 이 자료는 후대에 순교자들을 연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조선 입국 후 3달 뒤, 김대건은 다시 상해로 떠났고 조선에서 한 일들을 인정받아 1845년 8월에 사제서품을 받게 된다. 한국 천주교 첫 번째 사제가 탄생한 순간이다. 이전에 입국하였던 그 길 그대로, 김대건 신부는 프랑스 선교사와 성직자들과 함께 2번째로 조선입국을 시도하였다. 중간에 폭풍을 만나 원래 목적지가 아닌 제주도에 불시착하는 등 여러 시련을 겪지만 3달 만에 강경 인근의 나바위라는 교우촌에 도착하게 된다. 조선에 도착한 김대건은 다시 선교에 힘을 쓰는 한편,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전한 입국을 위해 또 다른 입국 경로를 계속 탐색하였다. 하지만 김대건은 외국 상인과 교역하는 배를 찾는 중 체포되어 황해도 해주 감영에 수감되었다. 계속되는 문초와 회유, 고문에도 김대건은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감옥에서도 선교사와 상해에 있는 프랑스 성직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었고 신자들에게도 편지를 써서 자신은 감옥에 있지만 용기를 잃지 않고 신앙을 지키라는 권고를 내린다. 조정에서 사학의 우두머리라는 죄명으로 김대건에게 최고형인 군문효수형이 내려졌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결국 김대건은 1849년 9월, 군문효수형으로 죽게 된다. 그의 나이 단 25살이었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성직자가 되어 조선의 신자들을 돌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정의 박해를 피해 도망 다니면서 편히 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교우들을 돌보며 조선을 돌아다녔다. 김대건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포용하고 사랑으로 대하였고, 유교 중심의 조선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 바람은 평등의 바람이었다. 김대건 또한 유교, 성리학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살았지만, 그런 사상에서 벗어나, 천주님 아래 양반과 백성의 차이가 없이 평등할 수 있다는 평등사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는 교우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더 이상 능력과 신분으로 사람들을 구분하지 않고 천주를 믿는 교인들을 모두 친구라고 하였다. 친구는 서로를 헐뜯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천주님 아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고 친구이며, 그러기에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김대건 신부의 메시지는 당시 사람들에게 감동과 울림을 주었으며 그의 메시지는 5차례의 박해에도 조선에 천주교가 계속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신념은 박해와 고문 아래에서도 굴복하지 않았고, 25살의 젊은 나이에 조선의 모든 교우들을 돌보고 사랑할 수 있게 하였다.
김대건은 시대와 현실 앞에서 안주하지 않고, 천주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적극적으로 배우고 실천하여 조선에 평등과 사랑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주었다. 그의 삶은 현재에도 우리에서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코로나, 세대 간 갈등으로 아파하는 현재, 김대건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는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5살의 젊은 김대건이 현재 우리들에게 전한다. 시대와 현실의 벽 앞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라고, 젊음은 한 번뿐이니 그저 그런대로 살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우리는 김대건 신부의 삶과 그 속에 녹아있는 사랑을 통해 좀 더 평화롭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김대건 신부의 삶을 살려고 노력할 때, 조선의 현실에 평등과 사랑의 정신을 심어준 김대건은 우리를 통해 21세기에도 그 가치를 심어줄 것이다. 코로나와 불화로 차가운 이 세상에, 우리도 김대건 신부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 도서
: 『성 김대건 바로알기』 김정수, 생활성서사,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