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도들
와우의 글로벌 메가 히트는 MMORPG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렸고, 와우 이후 수년간 나왔던 거의 대부분의 게임들은 와우가 드리운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그늘이란 바로 ‘개인화된 경험을 강화한 MMORPG’였고,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게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재미’라는 부분을 스스로의 핵이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수단 정도로 축소시킬 수 밖에 없었죠.
하지만 와우가 그렇게나 굉장한 위력을 과시하는 동안에도, 와우 이전의 MMORPG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꽤 있었습니다. 와우는 커뮤니티가 가진 부작용을 완전히 해소하는게 어렵다고 느꼈고 아예 그 비중을 축소시킴으로써 이를 우회했지만, 한편으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주는 재미는 오로지 MMORPG만이 줄 수 있는 장르 고유의 재미였기에 이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커뮤니티가 가진 단점을 최대한 억제하되 장점을 극대화하기위해 다양한 게임 디자인적 실험을 거듭합니다.
이런 여러가지 실험의 사례로 처음 소개드릴 게임은 ‘워해머 온라인’ 입니다.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을 만들어 MMORPG계에 ‘진영간 전쟁’ 컨셉의PvP를 소개하기도 했던 미씩 엔터테인먼트는, 이후 워해머IP를 활용하여 새로운 MMORPG를 만들었고 그게 워해머 온라인이 됩니다. 워해머 온라인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퍼블릭이벤트(Public Event)’라는 장치입니다. 퍼블릭 이벤트는 간단하게 말해서 규모가 좀 큰 퀘스트를 여러 명이 함께 수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와우에서 많은 플레이어들은 다양한 퀘스트를 하며 성장합니다. 퀘스트를 하는 많은 이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있다고 생각해보죠.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퀘스트를 하고 있지만, 이 플레이어들은 제각기 ‘독립적’으로 자기 퀘스트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파티를 맺지 않는 이상 이어지지 않아요. 그러나 워해머 온라인의 퍼블릭 이벤트는 다릅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퍼블릭 이벤트에 참여하는 플레이어들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에 주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와우의 퀘스트에서 진행되는 사건이 플레이어들 사이에 서로 독립적이라면, 워해머 온라인의 퍼블릭 이벤트에서는 사건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는 것이죠. 비유를 해보자면, 같은 카페의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지만 각자 자신들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무리가 와우의 퀘스트, 동일한 환경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무리가 워해머 온라인의 퍼블릭 이벤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느쪽이 더 좋고 나쁘고 하는 가치판단은 굳이 개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향점이 다를 뿐이니까요. 중요한 것은 와우식 퀘스트가 휩쓸던 시대에도 워해머 온라인은 사건을 공유하는 게임 디자인적 장치를 통해 다른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지향점의 끝에는 ‘커뮤니티가 제공하는 재미’가 있었을테구요.
아쉽게도 워해머 온라인은 대대적인 히트를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앞서 설명드린 정도의 장치로는 와우와는 반대되는 지향점이 주는 재미를 와우보다 더 재밌게 전달하기는 부족했거든요. 사실 퍼블릭 이벤트가 엄청나게 혁신적이거나 대단히 완성도 높은 피쳐도 아니었고 말이죠. 그런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작점에 가까웠죠. 워해머 온라인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의 다양한 다른 게임들에서 꾸준히 개선 발전되어 나갑니다.
그러한 개선 발전의 사례의 하나로 리프트 온라인을 들 수 있습니다. 리프트 온라인에는 ‘균열’이라는 이벤트가 있습니다. 리프트라는 영단어 자체가 균열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게임 내에 균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별도의 이벤트가 존재합니다. 이 이벤트는 꽤 큰 지역을 대상으로 상당한 스케일을 가지고 진행됩니다.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시공간의 균열을 뚫고 우르르 나타나 플레이어들이 이용하는 마을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죠. 플레이어들은 모두 뭉쳐서 이 이벤트에 함께 참여합니다. ‘함께’가 중요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 ‘사건을 공유’하는 것이죠. 워해머 온라인의 퍼블릭 이벤트보다 좀더 본격적이고 더 큰 스케일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시도들은 ‘길드워2’에 와서 결실을 맺습니다.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주는 재미’를 되살리기 위한 여러 시도들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길드워2에서는 소위 ‘하트 퀘스트’라 불리우는 단순한 – 아울러 필수적이지 않은 – 몇 가지 퀘스트와 전적으로 개인적인, 그러나 비중은 높지 않은 퍼스널 스토리를 제외하면 모든 사건들이 플레이어들 간에 공유됩니다. 농작물을 습격하는 곤충떼를 물리치는 것으로부터, 엄청나게 거대한 레이드 몬스터가 출현하는 것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이런 피쳐들로 게임을 채워놓았죠.
이전에도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으나 길드워2의 시도가 특히 결정적으로 유의미한 이유를 저는 ‘보상에 관련된 규칙을 달리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비교를 위해 극단적인 두 케이스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리지널 와우의 ‘필드 보스’입니다. 오리지널 때만 잠시 있었고 이후엔 사라진 피쳐로 ‘필드 보스’라는게 있었습니다. 레손, 아주어고스, 에메리스, 이손드레, 카자크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요. 예를 들어 그늘숲에 에메리스라는 필드 보스가 나타났고, 제가 이를 발견했다고 해보죠. 저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먼저 제가 친한 사람들 중심으로 비밀리에, 은밀히 에메리스의 스폰 사실을 알릴 겁니다. 에메리스를 잡을 공격대를 만드는 겁니다. 중요한건 그 과정에서 에메리스가 나타났다는 정보가 새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정보가 새면 골치가 아파집니다. 보상을 공유해야하기 때문이죠. 어떤 보스몹을 잡았을 때 아이템을 5개쯤 준다고 해보죠. 저 혼자 잡는다면? 혼자서 5개를 모두 가질 수 있습니다. 10명이 잡으면? 50% 확률로 먹을 수 있겠죠. 40명이 잡으면? 제가 아이템을 가질 확률은 12.5% 밖에 안됩니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보상을 나눠야 할 사람도 많아집니다. 결국 저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보스를 잡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최소한의 인원’이 의미하는 바는, 적정인원 외의 사람들은 모두 배제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한편 길드워2에서 길을 가다가 필드 보스를 만났을 때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의 행동 패턴은? 최대한 널리 알립니다. 우리 길드원이건 아니건 길가던 저렙이건 광물캐던 고렙이건 모두 모두 싸그리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다함께 보스를 사냥합니다. 최대한 많은 인원을 불러 모아서 함께 잡습니다. 누구를 배제하고 그런건 없습니다. 그게 가능하지도 않구요. 인원이 많아야 쉽고 편하고 빠르게 잡을 수 있습니다. 보상이요? 길드워2에서 이런 이벤트의 보상 기준은 와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개인의 퍼포먼스에 더 집중합니다. 저렙이지만 열심히 했나요? 그렇다면 최상급 보상을 드립니다. 고렙이니까 대충 했나요? 그렇다면 좋은건 못 드리겠군요. 보상의 총량에 제한이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열심히 한 만큼 가져갑니다.
와우에서 보상의 기준은 복잡하지만, 분명한건 그 총량이 언제나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공평한 기준’을 통해 이를 나누려 노력하지만, 양 자체가 적은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서로 열심히 도와가며 보스몹을 처치하는데까지는 동료였던 옆사람이, 보상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경쟁자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길드워2에서는 다릅니다. 보상이 제한없이 자신의 노력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에, 보상을 두고 서로 다툴 일이 없습니다. 옆 사람과 끝까지 좋은 동료로 남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와우도 최신 확장팩의 필드 보스들인 루크마르, 탈르나 등은 이전과는 다른 보상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방법은 닌자 등의 루팅 시 부작용을 막기 위한 것이지 길드워2와 같은 ‘모두모두 모여서 다같이 놀자’ 식의 플레이를 독려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게임의 구조자체가 서로 크게 달라서, 와우가 길드워2와 같은 보상 시스템을 쓰려면 게임 전체를 대대적으로 뜯어 고쳐야할테고, 그럴 리는 없겠죠.
필드 보스라는 유사한 피쳐를 두고 와우의 플레이어들은 배제를 시도합니다. 그게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행동입니다. 길드워2에서는 다른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함께 하려는 행동들이 나타납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행동입니다. 와우의 ‘보다 개인화된 경험 제공’에 맞서서, 길드워2는 ‘커뮤니티의 재미’를 강하게 추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어울려 노는 플레이에 더욱 큰 어드밴티지를 부여합니다. 두 게임의 지향점이 서로 다르기에 생겨나는 차이입니다. 길드워2 이후로 나온 MMORPG들은 이제 이 장르가 와우의 그늘에서 서서히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파이널 판타지의 마물사냥이나 돌발 임무 등이 그렇습니다. MMOFPS이긴 하지만 파이어폴 또한 전체 컨텐츠를 퀘스트가 아닌 이벤트 중심으로 꾸몄던 케이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