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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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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Sep 03. 2017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혼자 제주 여행

1. 때때로는 포기도 하나의 방법이다

내 생활의 대부분이 일과 연관된 일들로 채워져 있는 시간이 계속되고 있던 어느 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어딘가는 제주가 되었다.



제주에서의 첫날 아침, 바깥의 북적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을 먹는 사람들의, 잠에서 덜 깬, 하지만 아침의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그런 왁자지껄한 소리에 깬 게 얼마만이었을까.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지만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 깨버렸다는 짜증보다 재미있게도 굉장히 순수한 본능이 나를 찾아왔다. ‘아, 아침밥을 먹어야겠다.’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 아침밥의 시간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굉장히 천천히 밥을 먹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이 어색하지도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 밥을 먹고 나면 뭘 할까 생각했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그냥 지금의 시간을 즐기려고 했다.


밥을 먹고 씻고 일단 옷을 입었다. 여전히 목적지 따위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냥 가방을 챙겼다. 폰을 최대한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긴 했었지만 스마트폰 중독자에게 그 건무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제주 버스 노선이 이제 막 다 바뀐지라, 뚜벅이에게 지도 맵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그냥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그래도 제주도에 왔으니 일단 바다를 봐야 하지 않을까, 뻔한 스토리 같지만 뻔한 스토리가 어때서 뭐.



꽤나 긴 구간을 걸었다. 섭지코지를 가보겠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었다. 햇살은 조금 뜨거웠지만 제주의 바람이 계속 불고 있었던 탓에 덥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걷다 보니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가게가 있구나, 이런 집이 있구나, 이런 풍경이 있구나. 심지어 녹색이라는 하나의 색마저도 다 다르게 보였다. 이 풍경들은 사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 모습이겠지만 그걸 보는 나의 마음과 기분이, 서울에 있을 때와 달라졌을 뿐.


/ 걷다보니 성산일출봉이 보였다. 신양섭지 해수욕장. 


처음엔, 이 정도면 꽤 걸을만한데?라고 생각했던 게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많이 걸어봤자 15분 정도 걷는 게 다 였는데 40분이 넘게 걷고 있으니 그것도 그럴 만했다. 그래도 일단 계속 걸었다. 어디까지갈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일단 섭지코지는 찍고 와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중간중간 사진도 찍고 앉아서 살짝 멍 때리기도 하면서 걸었다. 위에 걸치고 있던 옷을 벗었다.


드디어 섭지코지 입구, 자전거, 마차, 전동 스쿠터 등 탈 거리들을 대여할 수 있다는 부스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걸어서 왔으니까 계속 걷자. 하지만 사실 꽤나 지쳐있긴 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 잔디밭을 지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멋진 하얀 등대도. 그 등대가 보이는 앞까지 갔다. 등대까지 갈 수 있는 계단과 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도는 산책로도.

그때 난 멈춰 섰다. 여기까지만 해야겠다고. ‘다 왔는데, 조금만 더 구경하면 되는데, 이쁜 바다가 보일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더 이상 가면 내가 너무 지칠 것 같았다.


/등대로 가는 길을 코 앞에두고 멈췄다. 섭지코지 


중도포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여기까지 와서 그냥 이렇게 돌아가버리는 게 괜찮을까, 여기까지 왜 온 거야 등등의 온갖 생각이 나를 잠시 괴롭혔지만, 곧 그만하기로 했다.


'가끔은 이렇게 해도 괜찮지 않을까? 목표에 다다르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열심히 걸었어.' 그 과정이 후회되진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의 선택이 그 과정을 퇴색시킬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세상엔 전력을 다했다는 성과의 기쁨만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더 지치기 전에, 또 다른 행복을 선택했다.


가끔은 이렇게 나를 멈춰 세워도 괜찮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난 혼자서 다 먹지 못할 음식을 시켰고 열심히 먹고 포장한 남은 음식까지 들고, 갔던 길을 되돌아왔다. 왜인지 갈 때보다 길이 더 짧게 느껴졌다.


그럴 거면 좀 더 움직였어도 되었을까, 내 마음을 좀 더 채찍질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오늘 누군가는 ‘포기’라는 말을 붙여줄지 모르는 일을 했지만, 나는 나에게 필요한 일을 했다. 등대에 올라갔으면, 산책로를 더 걸었으면 아름다운 하늘과 어울려진 시원한 바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내가 지 쳤다는 거, 그러니까 돌아가서 쉬어야 한다는 것, 그걸 알고 선택한 것도 나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가끔은 포기해도 괜찮다. 포기라는 말의 부정적 의미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다른 선택을, 다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걸. 그 길 또한 얼마든지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제주를 떠나서도 이걸 오랫동안 기억하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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