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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미노 Nov 19. 2019

까미노 프랑세스 5

어느 날, 순례자가 되다 - <까미노 바이러스> 연작

2. 온또 Honto -> 론세스바예스 Roncesvalles  : 21km ,  


 마침내 스페인!


 아침에 식사를 하고  등산용 막대로 나뭇가지를 줍고 (아~  다행이어라. 그 나뭇가지 없었으면 정말 걸어 올라가고 내려가기 힘들었을 듯) 피레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1000미터가 넘는 오르막 길을 천천히 올랐다.  피레네 산맥이라 그래서 엄청 경사가 있고 그럴 줄 알았는데 대관령 같은 완만한 언덕을 꾸준히 올라갔다. 

정말 정말 세찬 바람이 불었다. 

이 바람은 당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휘청 거리게 세차게 불었다.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꺼낼 수도 없을 만큼 바람이 불었지만 언덕에 있던 말들은 여유로이 풀을 뜯으며 햇살을 받고 있었다. 


어제 온또에서 보지 못한 순례자들도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너무 부는데 배는 고파서 길 중간에 배낭을 던지고 방석 삼아 앉아서 먹었다. 붉은 재킷을 입은 갈색 머리의 여인이 무언가 먹을거리를 꺼냈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날아갔다.  

나도 덩달아 허망함이 느껴졌다.  지금 돌아보면 너무 웃긴 장면인데, 당시엔 정말 허망하게 날아간 점심 도시락이었다. 


 스페인 길 십자가를 지나 올라 '롤랑의 샘'에서 물을 마시고, 유럽 중세 영화에서 본 듯한 늑대나 도둑떼가 나올 것 같은 숲을 지났다. 사람이 많이 안 다니는 길은 낙엽이 쌓이고 쌓여 밟을 디딜 때마다 종아리까지 발이 푹푹 빠졌다. 이때 아침에 숙소에서 주워온 나무막대를 푹푹 찔러보며 걸어서 그나마 괜찮았는데, 발이 낙엽에 쑥쑥 들어가니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들어서 갓길로 걷기도 했다. 중간엔 나무가 우거져 그늘이 심한 곳 즈음에 브라질 순례자의 무덤이 있었다. 

내가 처음 본 순례자의 무덤이었는데 너무 강렬한 산속 무덤으로 기억된다. 

카톨릭 신자들 중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속설 중 하나가 순례길을 완수하면 자기가 지은 죄의 반이 사해진다는 이야기가 있단다. 그래서 시한부 선고를 받았거나  몸이 아픈 상태로 죽기 전에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순례자가 산티아고 순례자 길에서 죽으면 비석을 세워 기렸다.  800여 km의 프랑스 길에도 사연 있는 순례자들의 비석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 브라질 순례자는 어떤 이유로  이역만리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 산중에 생을 마감했을까?


 낙엽이 너무 많이 쌓여 있어서 눈밭에 발이 빠지듯이 발이 쑥쑥 빠졌다. 머릿속에서  이 발밑에 뭔가 무서운 것이 내 발에 밟히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상상해 내고 나니 발을 내딛는 것에 속도가 떨어졌다.   한참을 그러고 내려오고 나서야 상상으로 만들어낸 두려움이 조금 사라져 갔다. 

론세스 바예스로 내려오는 산길. 

이 산길만 내려가면 오늘의 목적지인 스페인 작은 시골마을 론세스 바예스에 도착하게 되는데 날씨가 나빠진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우박이 후두두둑 떨어졌다. 챙겨 온 우산을 서둘러 꺼내 쓰고 내려왔다. 아아 한국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하다니?! 비 오는 날 산행이라니!!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노랗고 붉은 알록달록한 늦가을의 이국적인 산의 풍경이 참 멋스러웠을 텐데… 10kg 가량이나 되는 가방을 메고 모르는 산을 지나오다니 내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심지어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안개 덕에 길이 안보이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다행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다른 순례자가 한 명 있어서 무섭지는 않았다. 마음을 깨우려고 노래를 크게 부르기 시작했다. 

론세스 바예스 Roncesvalles에 도착!

마침내!!!

론세스바예스 레푸지라고 적힌 곳에 도착했다. 내 생에 첫 스페인 마을에 도착하는 길이었다.

성당 한편에 있는 유서 깊은 순례자들의 안식처인 숙소였는데 꽤 많은 순례자들이 벌써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낡고 붉은색 프레임으로 된 이층 침대였는데 덩치가 있는 사람들은 침대가 매우 좁아 보였다. 

그 숙소 앞에 있는 식당에 저녁식사 예약을 하고, 숙소에서 짐 정리를 하고 씻고… 휴우…


식당 저녁시간 전이라 그 앞 조그마한 바에서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페이스북에 정보를 좀 남겼다.  하루 종일 산길과 비와 우박, 안개에 시달린 내 위장이 보상을 받을 시간이었다. 순례자 메뉴엔 와인이 포함이어서 피로를 달래주기엔 제격이었다. 프랑스인 3명, 독일인 2명, 한국인 5명(실화냐?), 네덜란드인 1명, 스페인인 1명이 함께 식사를 했다. 그야말로 글로벌한 저녁식사 자리였다. 다들 같은 경로로 와서 묘한 동료애가 느껴졌다. 그러면서 오늘 있었던 일, 바람에 점심 샌드위치 날아간 이야기, 비 온 이야기, 우박 맞았냐는 물음,  안개 낀 산길에 언제 도착할지 막막했는데 내가 노래를 불러줘서(내가 부른 노래는 “사랑가”) 한국의 아내 생각이 엄청났다는 한국 아저씨의 이야기가 식탁을 가득 채웠다.  


숙소를 돌아와 다들 곯아떨어졌다.


자는 데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 좁은 침대 2층에서 누가 떨어진 것이다. 


떨어진 것을 본 프랑스 인이 Are you OK?(괜찮아?)라고 물어봤는데 떨어진 한국인이 벌떡 일어나며 I’m OK!(난 괜찮아!)를 여러 번 이야기했다. 어디 다쳤을까 봐 걱정은 되는데 너무 웃겨서 다들 큰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얼굴을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조용히 웃었다. 나라도 피곤하니 뒤척이다 떨어지겠다 싶은데 그냥 안 다쳤으니 다행인데 너무 웃긴 거다.  


그렇게 프랑스 순례길의 첫 관문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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