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 2
매끄러운 연출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공감 가는 대사, 아름다운 음악 등 영화를 좋아하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보통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비로소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관객의 기억 속에 머무는 영광을 누린다. 그렇지 않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작품성이 아주 뛰어난 영화보다도 기억 속에 오래 남아 있는 영화들이 간혹 있다. 남들의 평과는 별개로 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영화, 나의 깊은 감정을 건드리고 끌어낸 영화가 그렇다.
인사이드 아웃 2는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지만 이제까지 본 영화 중 최고의 작품성을 가진 영화라 말하기는 어렵다. 인사이드 아웃 1에 비해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부 새로운 캐릭터의 매력이 전편에 비해 떨어지고 감정 몰입도가 아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둘 중 어느 편이 더 '좋으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인사이드 아웃 2라고 말할 것이다. 나에게 영화 관람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더라도) 여전히 개인적인 경험인데, 인사이드 아웃 2는 내게 개인적으로 훨씬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인사이드 아웃 1이 개봉한 후 거의 십 년이 지난 후에, 그러니까 약 9년 만에 선보인 인사이드 아웃 2는 나를 포함한 많은 영화팬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인사이드 아웃 1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고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우리는 말이나 글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연출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의심했다. 그리고 픽사가 그 어려운 일을 놀랍게도 훌륭하게 해냈기 때문에 '인사이드 아웃'을 쉽게 잊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 2의 라일리는 사춘기 여학생이다. 이제 청소년이 된 라일리의 머릿속에는 어릴 때보다 훨씬 다양한 감정이 생겨났고, 지키고 싶은 신념들을 모아 '자아'도 형성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감정 중 하나인 기쁨(Joy)이는 다른 감정들과 함께 여러 신념을 모아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라일리의 자아를 형성한다. '라일리는 '좋은 사람'이라는 신념을 가진 바른 아이로 잘 성장하고 있어'라고 생각해도 될까? 세상 일이 그렇게 만만치는 않은 법. 라일리가 청소년이 되자, 라일리의 감정 세계에서 급격하게 비중이 증가해 기쁨이의 자리를 위협하는 불안(Anxiety)이가 틈만 나면 라일리의 자아를 바꾸어 놓는다.
불안이가 만든 자아가 커지면 라일리는 즐겁기만 했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불안을 느낀다. 친구들보다 더 앞서 나가야 한다는 경쟁심, 뒤쳐질까 봐 두려운 위기감은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신념 때문에 더욱 증폭된다.
감정들이 심한 갈등을 겪고 충돌하자, 라일리 감정의 세상은 지진이 난 듯 심하게 흔들리고 붕괴된다. 물론 그 감정의 주체인 라일리의 삶도 평탄할 리 없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진폭이 큰 업다운을 반복한다. 라일리의 고통을 지켜보던 감정들은 고민 끝에 큰 결심을 한다. 자랑스럽게 완성했던 라일리의 자아 '나는 좋은 사람이야'의 뿌리를 뽑아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논박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훌륭한 자아, 단순하고 선명했던 자아인 '나는 좋은 사람이야'가 뿌리 뽑히자 여러 가지 자아들이 자유롭게 떠오른다.
나는 라일리처럼 사춘기도 아닌데, 이게 무슨 일이람. 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도 라일리처럼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런데 때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지, 남들이 볼 때 좋은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날이 갈수록 헷갈렸다. 이러한 신념 또는 자아로 겪게 되는 어려움도 많았다. 모든 상황과 사람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곤 했다. 중간이 없으니 라일리처럼 업다운을 반복할 때도 있었다. '좋은' 무언가가 되지 못하는 나는 '나에게' 비난받기 십상이었다. '최고로 잘하지는 못했지만 처음치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가 아니라 '나는 왜 이럴까'하는 자책에 빠져들었다. 마치 불안이가 만들어낸 '나는 아직 부족해(I'm not good enough)' 자아의 스위치가 '지금이야!'하고 켜지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엄격하고 딱딱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넉살 좋고 친화력이 좋지만,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은 아니구나' 대신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가 되면, 어느 순간 거리를 두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즐겁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피곤해질 때가 많아.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 싶어.' '남을 배려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내 일이 급할 때는 다른 사람 사정까지 고려할 마음의 여유가 없어.' 등으로 내 감정을 들여다 봐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조성모의 '가시나무'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시인과 촌장 노래의 가사이다. 노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쉴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고 나로만 꽉 차있는 나를 되돌아보는 내용이지만, 내 안엔 내가(나의 자아가) 너무도 많다는 의미로도 다가온다. 이런 나도 나, 저런 나도 나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면 인사이드 아웃 2에서 '나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자아가 깨질 때처럼 조금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좋은 사람과 부족한 사람 사이의 진폭은 너무 커서 그 둘을 한 번만 오가도 감정의 소모가 상당하다. 양극단에 있는 단 두 개의 자아나 판단 기준이 대신, 다양한 자아와 인식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브레인스토밍 맵 같은 공간을 마련해 주면 어떨까. 그러면 내 안의 감정 세상도 안정을 찾고,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