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감기가 찾아올 때.

공황장애는 연예인만 걸리는 거 아닌가요?

새로 옮긴 팀에서 팀장의 괴롭힘이 심해지던 어느 날 아침,

양시숲 4번 출구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올려다본 그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정말 말 그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 앞이 하얘지고 그대로 한 쪽 벽에 한참을 기대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컨디션이 안좋아 진 건가 했다.

평소에 웨이트와 런닝을 하루에 두 시간씩 할 정도로

체력이라면 알아주는 나였기에

어딘가 고장이 났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날 수록 증상은 똑같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병원에 갔고 공황장애 초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약을 들고 나오는 길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나인가, 열심히 일한 것 밖에 없는데' 라는 억울함과

참다가 병이 될 거였으면 참지 말고 들이 박을 걸 이라는

회한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생각해보면 내 몸에서는 신호를 계속 주고 있었다.

한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움직이고, 배우던 나였다.

그런데 그 팀장과 함께 하고 나서는

퇴근하고 집에가면 아무리 일찍가도 누워서 꼼짝을 못했다.

그렇다고 잠을 잘 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력하게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그 때 알았어야했다. 내 마음이 아프고 있었다는 것을.



아빠한테 전화를 했다.

평소에 무뚝뚝하기만 한 딸이 전화를 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아빠는 대뜸 말했다.

"힘들면 그만해도 된다. 내 딸 그 꼴 보자고 애지중지 키운거 아니다"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다.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이대로 무너지기에는 내가 너무 아까웠다.

그 팀장이 뭐라고 내가 무너지겠는가.

열심히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봤다.

"보란 듯이 잘 살아 가는게 최고의 복수다."

생각하고 하루하루를 버텼다.


운이 좋게도, S그룹에서 이직 오퍼가 왔고

경력을 살려 단숨에 탈출 할 수 있었다.

병원도 열심히 다녔고, 초기에 관리를 잘한 덕택에,

그리고 새로 이직한 회사가 그나마 평온한 덕분에

내 마음의 감기는 꽤나 잘 치료가 되었다.



내가 아팠다는 사실을 퇴사하는 그 순간까지도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내 전 직장 동료들은 모른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그 팀장과 대화한 녹음파일 다 다운받아서

노동청에 신고를 해버릴까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서도 하지 않은 데는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HR이란 직무가 본디 다 돌고 도는 곳 아니겠는가.

새로 직장을 옮기는 마당에 전 직장의 볼썽사나운 이야기를

굳이굳이 끊어내지 않고 들고가는게 그닥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다.


둘째로,(이것이 좀 더 근본적인 이유이긴 하다)

그 수준 이하의 사람 때문에 내가 아팠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내 단점을 세상에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잘되는 모습, 뒤도 안돌아보고 때려치고 나가는 모습을 보이는게

그 당시 나에게는 최선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 선택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아마 그 당시에 내가 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 팀장이란 작자는 원래 정신이 나약한 애라며 또 분명 어디선가

본인에게 유리한 말만 하며 씹고 뜯고 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 팀장에게 고마울 지경이다.

그 팀장 덕분에 더 잘 살아야겠다는 오기도 생겼고,

투자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코피터지게 한 덕에

학창 시절 꿈꾸기만 했던 원하는 학교 MBA에 합격에

미국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감기는 온다.

본인도 모르게 스쳐지나갈 수도 있고,

나처럼 심한 열병을 앓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나는 공황장애는 연예인들만 걸리는 건줄 알았다.

내가 그 당사자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처음에는 그저 기가막히고 화가날 뿐이었다.


그 모든 시간들을 버티고 지나고 나니,

세상을 대하는 내 시선이 좀 달라졌다.


과거에는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걸까? 내가 뭘 잘못했나?'

원인을 나에게서만 찾았다면

지금은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마치 길 가다 맨홀에 갑자기 빠지듯,

불운이 갑자기 몰아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이 닥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지만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내 잘못이라고

수 없이 되뇌이며 시간들을 버텨왔다.


작은 것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가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조금씩 나를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혹, 지금도 마음의 감기가 있는 분이 있다면

이 글이 조금이라도 해결의 실마리가 되길,

적어도 마음의 위안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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