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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Jun 05. 2022

'청년'이 바라는 '공정'과 '상식'???

가톨릭포럼 토론문 (2021. 10. 6)

* 이 글은 2021년 10월 6일 열린 제21회 가톨릭포럼 '한국 사회와 공정, 청년문제 해법은' 의 토론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청년이 바라는 공정과 상식’은 이번 포럼의 주최 측으로부터 요청받은 토론문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청년’과 ‘공정’, ‘상식’, 어느 하나 쉬운 단어가 아닙니다. 저는 대학과 활동을 통해 비판적 문화연구(critical cultural studies)를 공부했고, 이 학문은 상식(common sense)과 같이 자명해 보이는 단어가 실상 얼마나 자문화중심적이고(ethnocentric),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는지를 폭로합니다. ‘청년’은 2000년대 중후반부터, ‘공정’은 2010년대 후반부터 이것이 마치 하나의 시대정신이라도 되는 양 출몰하고 있는 유행어(buzzword)입니다. 그러나 두 단어에도 마찬가지의 혐의가 있습니다.     


청년이라는 세대 집단은 단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내부의 격차와 불평등이 심각한 이질적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 이제는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청년이 아니라 다른 세대 집단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가 통하며, 또 청년 내부를 구분하기 위해 ‘여성 청년’, ‘지방 청년’과 같은 범주를 도입하더라도 단일한 집단을 추출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서 청년을 주어로 하는 어떠한 문장이나 어구도 문법적으로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점에 대한 고려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특히 ‘공정’과 같은 단어를 만날 때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는 연령 분류법상으로 청년에 해당하는 누군가가 공정성 주장을 할 때 그를 재빨리 청년으로 패싱(passing)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직원’이나 ‘반페미니스트’, ‘국민의힘 또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 ‘특정 온라인커뮤니티 이용자’와 같은 좀 더 명확한 명칭을 ‘청년’이라는 포괄적인, 그렇기에 그 단어만으로 일정한 대표성을 확보하는 명사가 대체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직원’이나 ‘페미니스트’도 청년에 해당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를 ‘청년’의 목소리로 재현하는 힘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혜화역 시위 등에 대한 보도는 주로 ‘청년’이 아니라 ‘20대 여성’의 이야기로 다루어져 왔습니다.) 이같이 ‘청년’이라는 단어 안에 누군가를 선택하거나 배제하는 힘이 언제나 작동하고 있기에, ‘청년이 바라는 공정’이라는 말은 언제나 청년 중 누군가의 목소리를 키우고 또 누군가의 바람을 은폐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세대가 다른 세대보다 공정성 문제에 더욱 민감하다고들 하는데, 막상 설문조사에서 연령대별 분석을 해 보면 형평(equity) 원리에 대한 선호도가 젊은 연령대에서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거나 오히려 더 낮게 나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청년’을 잘못 주어로 가져오는 관행이 바로 담론과 통계의 괴리가 출발하는 지점입니다.     


저는 청년의 공정과 상식을 (적어도 분석적으로) 이야기할 때, 도대체 청년세대가 집단적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가기를 바라는가를 찾으려 하는 불가능한 노력을 줄이기를 원합니다. 이런 방식의 논의는 대개 반복하여 말하자면 사실상 많은 청년의 목소리를 배제합니다. 배제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문장이 많은 청년을 배제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망각한다는 점이 더욱 문제입니다. 또한 이렇게 도출되는 청년의 목소리는 스피커(정치인, 언론인, 평론가, 학자 등)의 관점에 부합하면 강조되고 그렇지 않으면 애써 부정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한마디로 ‘청년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공정성 주장을 하였을 때, 그 개별 ‘청년이 바라는 공정과 상식’에 대해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는 사회의 역량과 윤리입니다.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 정준영 연구원이 제기해 오고 있는 청년정책에 대한 권리 기반 접근(rights-based approach)을 참조하여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권리에 대한 문장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권리 주체 a는 권리 상대방 b를 향하여 X라는 근거에 따라 G에 대한 권리를 보유한다.” (청년에 이를 적용해보면, 청년은 국가에 대하여 청년기본법이라는 근거에 따라 행복한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당 법은 청년을 “19세 이상 34세 이하인 사람”으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행복한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방식으로 보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정책에 있어서 권리 기반 접근의 핵심은. 1)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 중심 목적이 된다는 것, 2) 권리 주체 a와 권리 의무자인 b, 권리와 의무의 내용인 G를 분명하게 식별하는 것, 3) 권리의 요구 능력과 의무의 이행 능력 강화까지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책을 사회 문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과정에 관한 이야기로 바꾸어 이해해도 좋겠습니다.     


청년 공정성 담론으로 이어진 몇몇 사건 내지는 공정성 주장에 대해 한국사회는 다음 절차로 주로 특정 방식의 정치화를 진행해 왔습니다. 공정성 주장은 빠르게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고, 개별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 다면적으로 검토하는 공론의 진행은 더디었습니다. 이를테면 인천국제공항공사 건과 관련하여 기존 정규직 직원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정책 취소를 정부에 요구하는 권리 주장과 이것의 기반이 되는 공정성 주장은 현 정부에 대한 정치적 공격 용도로 빠르게 소비되거나, 정규직화 정책을 지지자들에게는 해결하여야 할 적(내지는 사회 붕괴의 증거)으로 섣부르게 범주화되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권리의 구성 요소인 a, b, X, G를 분별하는 방식에 따라 논점들을 다소 도식적으로 일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한 세부 정책이나 사업이 입안되고 집행되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권리 주체의 자리에 청년시민을 권리 상대방의 자리에 국가를 두고 있나요, 혹은 청년시민을 국가의 권리에 대응하여 ‘뒤따르는 의무’만 하면 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나요? 권리의 내용인 G는 ‘정규직’이라는 고정된 지위로 이해되는 것이 타당한가요, 아니면 존엄한 노동과 같은 조금 더 포괄적인 내용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따른 구체적인 과제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가요? 정규직화를 권리의 내용으로 보고 있다면, 그 근거가 되어야 할 X는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어느 정도 이해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합의되어 있나요? X, G가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한다면 여기서 권리의 주체 a는 왜 모든 비정규직(내지는 불안정노동자)이 아니라 몇몇 시범 사업장이 되어야 하는 건가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합의보다는 더 정확한 표현일) 타협은 쉽지 않습니다만 꼭 거쳐 가야만 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여러 청년들이 바라는 개별 공정성 주장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제언은 ‘청년의 목소리를 무조건 수용하라’는 요구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아이가 운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청년’에 맞추어 가겠다는 수사는 다른 성인과 청년세대를 구별지으면서 청년을 책임과 역량 없는 주체로 격하시키는 효과를 산출하기도 합니다. 제대로 듣거나 검토하지 않고 일단 좋은 말이라고 하거나,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것은 청년의 사회적 성원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도 같습니다. 사실 이는 청년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데,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기업가로, 또 시민들을 단순한 소비자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빈약한 정치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한국사회에 거대 양당 체제에 의해 돌아가는 권력 싸움으로서의 정치는 너무 과잉된 반면,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문제해결 역량으로서의 정치는 너무 과소합니다. 평등한 시민들의 사회적 합의나 이를 명문화함으로써 공동체의 규칙과 운영 원리를 만들어가는 역량을 아무리 키워 보아야, 결국 정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다 뒤집어지는 것이라는, 즉 법과 시민 위에 정치권력이 있다는 식의 실천감각을 너무 많은 시민이 체화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 또한 청년정책의 필요성과 정당화 원리를 합의하기 위해 일하고 토론했던 지난 나날들이 정치적 당파성과 관련하여 단순하게 싸잡히거나 비난받을 때, 특정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기관의 위수탁 법인과 대표자 변경과 함께 기관이 완전히 변신하는 것을 볼 때 갖게 되는 허무함의 감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의견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고, 그것은 청년도 똑같습니다. 어떻게 내 의견을 사회적으로 설득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사회적 타협’은 머나멀고 어려운 일로 보이고 오히려 각자의 마음을 투사할 수 있는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권력을 주는 일이 좀 더 쉽고 가깝게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권한으로서의 권력의 민주적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특정한 정치인에게 기대를 투사하고 실망하는 일이 반복, 누적되고 정치적 주체로서의 개인들은 소진되어 갈 것입니다. 의문을 갖지 않고 시키는 대로 참아내는 삶의 태도가 점점 희귀해지는 흐름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수’와 ‘민주’ 양측에 번갈아가며 실망하고 있는) 현재 젊은 층의 투표 선택을 해석할 때 단기적인 자료를 통해 ‘보수화’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상당히 성급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공정’과 ‘청년’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유행어는 ‘소통’입니다. 많은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들은 소통을 하기 위해서 여전히 TV에 나오고,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하면서, 또 행사를 개최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열심히 하고,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노출시킵니다. 현 정부는 특히 청년정책과 관련하여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예산과 규모, 부처 편제 등을 확대했다는 데 대한 자부심을 가진 듯 보입니다. 그러나 청년시민에게 민주주의 정치에서의 성원권, 즉 권력/권한을 실질적으로 분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정책의 목록은 많아졌지만 청년시민은 여전히 사업의 대상이고, 그 정책을 늘렸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홍보하고 칭찬받으려 하는 책임의 주체는 정부에게 남아 있습니다. ‘정부가 잘했으니까 청년은 지지만 해’, 즉 ‘답정너’의 태도로 비춰질 이 이미지가 바로 ‘꼰대’이고 ‘불통’이라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의 실체입니다. 저는 이 ‘소통’의 부분과 관련해서 내년 대선에 나오겠다는 후보들 중 특별한 복안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기가 아직까지는 어렵습니다.      


정부가 신뢰를 줄 수 없을 때, 민주적 정치는 어려워지고 시민들 사이에서의 공정성 인식도 후퇴합니다. ‘청년이 바라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제목에서 시작한 이야기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사실상 청년(혹은 시민) 누군가가 사회가 공정하다, 내지는 상식적으로 정부가 운영된다는 생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결국 그 결정 과정과 소통 과정이 실질적으로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형식적 필요성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청년이든 누구든, 결국 가장 바라는 공정과 상식이라는 것은 사람을 사람 대접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며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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