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여행
손을 베어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 의사는 지혈조치만 해주고, 일주일 정도 매일 드레싱을 하라는 처방을 내렸다. 다음날 병원을 찾았을 때, 다른 의사의 결정으로 몇 바늘 손가락 상처 부위를 꿰맸다. 붕대를 풀었을 때 하루가 지났는데도 피가 돋는 걸 보니 꿰매지 않고서는 상처가 쉽게 아물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문득, 시칠리아 체팔루 언덕을 오르면서 동료가 보여준 상처 부위가 생각났다. 10년 이상 알아온 사이지만, 상처가 손목 안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굳이 말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거였다. 그녀 역시 요리를 하다가 칼에 베인 상처였고, 오래된 상처지만 여전히 흔적이 남아있었다.
시칠리아 카타니아 숙소에서의 일이다.
카타니아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에도 화산이 폭발할 수 있다며 그런 조짐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주겠다는 주인장의 농담이 진담으로 들릴 만큼 에트나 화산을 끼고 사는 도시였다. 팔레르모에서 카타니아로 진입할 때는 마치 제주도의 한라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은 ‘정결한 여신’으로 유명한 오페라 노르마의 작가 빈센초 벨리니의 고향이다. 아가타 두오모 광장을 비롯해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카타니아 대학, 그리고 널찍한 대로변으로 현대적인 건물과 명품 가게들이 혼재되어있는 활기찬 도시였다. 카타니아 사람들이 로마 원형극장의 일부를 그대로 주춧돌로, 담장으로 활용하여 집을 짓고 사는 모습은 호쾌해 보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멋을 자아냈다. 매일 아침 새벽시장이 열려 싱싱한 해산물과 야채를 구입할 수도 있고, 각종 파스타와 아란치니, 깔라마리 등 먹을 것이 넘쳐났다. 늘 화산폭발의 위험을 안고 살지만 그래서 현재에 더 충실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후가 되면 아가타 두오모 광장에 나와 커피를 즐기는 여유를 누렸다.
밤이 되어 그녀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10시가 넘은 시간인데 바로 집 앞을 악단이 지나가는 게 아닌가. 문밖을 내다보니,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행진을 하고, 경찰차 몇 대가 그 뒤를 호위하고 있었다. 악기연주는 집 앞 작은 성당에서 멈춘다. 나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바깥문을 잠그고 그들을 따라 구경을 나갔다.
각자 하루 일을 마친 마을 사람들이 정장으로 갈아입고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들고 나와 마을 행사에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밤늦은 시간에 종소리를 울리면서 말이다.
집에 돌아오니 잠에서 깬 동료는 상기된 얼굴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 문이 잠겨있고, 내 핸드폰도 신발도 집 안에 있어서 자신이 갇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는지 거의 멘붕상태라며 나를 나무랐다. 두려움 없이 씩씩한 사람이 자다가 일어나 어린아이 마냥 겁먹은 표정을 지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낯설었다. 동시에 섭섭한 마음이 스멀거렸다. 자신이 감금되었다는 생각을 했다면 나는 납치당한 건데, 나에 대한 걱정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던 것 같다.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서로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게. 여행을 시작한 지 40일쯤 되었을 시점이니 그럴 만도 하다.
우습게도 나는 카타니아 숙소에서는 씻는걸 게을리했다. 지나치게 작은 타일로 도배된 샤워실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여행자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만 대신 불안과 위험도 늘 함께한다.
긴 여행을 함께 하다 보면, 서로 드러내지 않아도 될 상처를 드러내놓기도 하고, 감추고 싶은 약점들도 여실히 드러난다.
두 사람 중 한 명인 그녀는 훌륭한 여행자임에 분명하다. 그녀가 갖는 추진력과 순발력, 친화력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단지 문제는 그거다. 그녀가 일정을 진행하는데 신경 쓰다 보면 동행자의 취향과 생각까지 살피기가 쉽지 않다는 점. 그건 오히려 동행자가 배려하고 감수할 문제이다.
여행 중에도 여행이 고프다는 그녀는 이번에는 혼자만의 여행을 감행하고 있다. 박수를 보낸다. 그녀가 여행 중 어느 순간 쾌감을 느낄지도 알 것 같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길 바란다.
그러다가 쓸쓸하면 다시 함께 여행하자고 청해 본다.
희정. 고마워요.
덕분에 세상 구경 잘했습니다.
2026. 1. 20.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