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꽃은 피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나를 보호하려고 본능적으로 엄마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내 감정은 뒤로 감추었다. 엄마가 기분이 좋으면 다가갔고, 불편해 보이면 조용히 물러났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렇게 나는 감정의 자동 조절기를 가진 아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엄마와 같은 공간에 있어도 편안하지 않았다. 어쩌다 몸이 스치듯 닿을 때면 화들짝 놀라 후다닥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TV를 보며 웃을 때도 엄마와 연결되지 않은 감정들이 어색함으로 허공을 헤맬 때가 있었다.
그 어색하고 낯선 감정이 어른이 되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했다. 엄마와 나 사이의 안전거리는 70센티 정도 되는 듯하다. 그 정도의 거리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중학생인 희정이는 자신이 생각하는 엄마와의 안전거리는 1미터라고 했다. 그런데 엄마가 원하는 안전거리는 빈 공간이 없는 합체 상태인 듯하단다. 모든 것을 궁금해하고 정해주고 통제하려고 한다고 숨이 막힌다고 했다.
엄마가 자꾸 경계를 허물고 다가올수록 희정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안으로, 집밖으로 멀어진다. 학교에서 돌아와 “ 다녀왔습니다”라고 하면 엄마는 경찰이 조사하듯 표정을 살피고 기분 좋아 보이면 “방방 뛰지 마! 그러면 너는 꼭 사고 쳐”라고 하고 시무룩하면 “무슨 일 있냐”라고 꼬치꼬치 캐물어 숨이 막힌다고 했다.
그래서 희정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엄마 앞에서는 무표정으로 살기로 했다고 한다. 그 무표정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했다. 1미터와 무표정이 희정이와 엄마 사이의 안전거리였다.
희정이 엄마는 어렸을 때 엄마 사랑을 못 받았고 한다. 일하느라 바빠 늘 혼자였다고 했다. 외로워서 엄마가 되면 하나하나 다 이야기하는 친구 같은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데 희정이는 그 사랑을 불편하고 힘들어한다.
참 어렵다. 엄마와 딸 사이의 편안한 거리. 안전한 거리. 가까이 다가가도 힘들어지지 않고 너무 멀어져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거리. 나도 희정이도 희정이 엄마도 엄마와 딸 사이의 ‘적당한 거리’를 찾으려 불편한 마음을 뾰족뾰족 표현하고 있다. 고슴도치처럼 서로에게 다가가려 서툴게 서로에게 상처 주며 안전한 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희정이에게 안전한 거리를 찾는 것은 너무 어렵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 감정은 중요하지 않아’라는 생각으로 감정을 감추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상담을 통해 희정이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연습을 시작했다. 안전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며 엄마와 맞춰가는 중이다. 내면에 힘이 생기고 대처 방법을 알게 되니 ‘내 감정도 중요해! 감정을 표현해도 나를 지켜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엄마,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쉬고 싶어요”
“엄마, 도움이 필요할 땐 말할게요. 저에게 관심을 조금만 꺼주세요. ”
희정이는 지금도 엄마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 거리는 상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안전하게 자신을 지쳐주기도 한다. 다만 너무 가까워 힘들지도 너무 멀어 외롭지도 않은 거리를 찾고자 한다.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을 지키고 마음을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싶다.
엄마와 희정이 사이 1미터, 나와 우리 엄마사이 70센티. 그 거리는 상처를 남긴 거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을 만날 수 있었던 거리이기도 하다. 그 거리를 통해 희정이와 나는 지금도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그 거리 덕분에 나와 희정이는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1. 엄마와 나 사이에 감정적인 거리를 숫자로 표현한다면 몇 미터쯤 될까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2. 너무 가까워서 힘들었던 기억, 너무 멀어져서 외로웠던 기억을 각각 떠올려보세요.
3. 지금 그 거리에서 나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나요?
4. 엄마와의 관계에서 나를 지켜주는 건강한 거리란 어떤 모습일까요?
사진: 픽샤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