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와 자존심
20대 한창 꿈을 꿀 나이에 수많은 실패와 포기를 경험하면서 세상의 냉혹함을 뭐가 그리 급하다고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세상은 만만치 않구나.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없구나라고 너무 일찌감치 결론을 내버렸던. 그래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나의 포기와 실패 이력서를 꺼내 보았다.
1993년, 내 인생에서 가장 첫 번째 실패를 경험했다. 대학 입시였다. 그때는 몰랐다. 이것이 그때는 몰랐다. 이것이 내 실패 컬렉션의 시작이 될 줄은.
1994년 생각지도 못했던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생겨 ROTC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왜 나는 안 되는 걸까, 세상이 나를 받아 주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1997년 편입 시험 실패 후에는 쿨 한 척은 했지만 일주일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창문 밖의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1998년 복학을 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학교로의 복학. 나에겐 그저 그런 인생을 역전시킬 한방이 필요했다. 그래서 친구와 회계사 공부를 시작했다. 열심히 했다. 1차 시험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친구의 시험 포기로 나도 회계사 시험 준비를 포기했을 때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도망치는 거야? 그럼 또 실패하는 건데도? 자책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시작된 관세사 시험으로의 도전. 다행히 1차는 통과했지만, 각 종 비굴했던, 무책임했던 이유들을 포장하여 이건 길이 아니야 비전이 없어라는 핑계로, 내 몸 구석구석 모든 세포들을 하나하나 세뇌시켰다. 결국엔 2차 시험 몇 개월을 앞두고 아무도 모르게 포기하고, 그러기에 차마 포기했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2차까지 남은 4개월의 시간을, 공부 열심히 하는 척, 스트레스받는 척, 자신 있는 척. 척척척하면서.
더 비굴하고 비겁했던 건, 2차 시험 당일 차마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처 PC 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시험 보는 척을 해야만 했던 나. 내 인생 최대의 자기혐오 순간이었다. 간신히 잡은 희망의 끈을 누구의 강요가 아닌 내 손으로 놓아버린 거니까. 곧 사라질 험난한 파도 앞에 항상 이렇게 무기력하게 포기를 한 거니까.
이렇게 나는 크고 작은 실패와 포기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이 되어 갔다.
매일 아침 거울을 보는 게 두려웠다. 거울 속 내 모습은 실패자, 낙오자, 포기자 그 자체였다. 밤마다 이불속에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왜 꾸준히 하지 못할까 왜 이 모양일까라는 생각을 하다 잠들곤 했다. 친구들은 하나둘 자리를 잡아갔지만, 나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고, 그들과 연락하는 것조차 피하게 됐다. "요즘 뭐 하냐"는 질문이 두려웠으니까. 그 질문이 넌 왜 그 모양이냐라고 비웃음처럼 들렸으니까.
그렇게 자신감은 점점 더 바닥으로 떨어졌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나는 계속해서 실패할 거야, 또 하다가 포기할 거야라는 생각이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결코 빼낼 수 없는 것처럼.
그래도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다시 해보고 싶었다. 아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을 가고 싶었다. 더군다나 관세사 2차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계를 냈고, 1년이라는 시간을 투자를 했으나 결국엔 시험을 포기했으니, 이젠 마지막 학기에 복학하여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앞뒤좌우가 꽉 막힌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하루하루가 물들어 가던 찰나 역대급으로 기발한 해결책을 찾았다.
마침 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갈 학생들을 모은다는 광고를 보았다. 도망가자. 다른 어떤 선택이 없었다. 그것도 태평양을 건너서. 실패한 내가 아니라,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는 곳으로 라고 마음속에 조용한 울림이 있었지만, 그것 조차 나에겐 사치였고, 그냥 피할 곳이 필요해서 도망치듯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학연수라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그저 도피였다.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 실패한 나로부터의 도피.
그런데 웃긴 건, 이 나름 전문적인 도망이 마치 치밀한 계획을 한 것처럼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는 거다. 여기서는 아무도 내 과거를 몰랐다. 내가 몇 번 실패했는지, 몇 번 포기했는지 아무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그대로 나였지만, 그 위에 가면을 쓰고 있는. 그렇게 9개월 어학연수로 미국에 도피를 왔던 내가, 좋은 분들과의 만남과 교제로, 좋은 공동체와의 축복의 만남으로, 내가 실패한 게 아니라... 그냥 길을 잘못 들었던 거 아닐까? 이 부족한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라는 간절한 희망의 작은 불꽃이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2년이라는 시간을 더 투자하여 필요한 수업을 듣고, GAMT 공부를 하여 MBA에 도전했다. 이번엔 달랐다.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실패도 내 삶의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처럼. 혹시 첫회가 또는 다른 에피소드가 보잘것없었다고 할지라도 시즌 전체는 멋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첫 취업을 하고, 취업 후 14년 만인 2019년도에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옛날 실패들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그 모든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재료였으니까. 마치 실패라는 레고 블록을 하나씩 쌓아 올려 지금의 성을 만든 것 같았다. 무심코 밟은 레고 조각에서 받은 고통은 덤으로.
이젠 더 이상 실패는 나를 옭아매는 밧줄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내가 그 당시 이어폰 선이 가방 속에서 엉켜있는 것처럼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이었을 뿐. 가방 속에 있는 걸 모두 밖으로 꺼내어 작은 것부터 천천히 꾸준히 치열하게 풀면 된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가끔 새로운 매듭과 같은 도전에 마주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래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매듭은 하나하나 작꾸천치 처럼 풀어나가면 된다는 것, 때론 선이 없는 무선 이어폰을 사는 게 답일 수도 있다는 걸, 또는 가방 안에 있던 책들로 인해 이어폰이 망가져도 쿨 하게 다른 걸 사면된다는 걸. 실패가 나를 만들었다는 말은 마치 인스타그램의 #오늘도 파이팅 같이 너무 진부하게 느껴졌다.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20대의 나에게
"넌 지금 실패한 게 아니야. 그저 아직 네 무대를 찾지 못한 거야. 무대는 찾는 게 아니라 한 땀 한 땀 만드는 거니까”
지금의 나에게
“넌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와 은혜로 만들어진 무대 중앙에 서 있어. 하지만 이제는 그 중앙을 다음 세대에 내어 주어야 할 때야. 만남의 축복으로 네가 받고 누리고 있는 복들을 나누면서 말이야”
시편 37:23-24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완전히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