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것을 그리워하자
호랑이 담배 물던 시절의 이야기는 너무 식상하려나. 너도 나도 사무실이고 대중교통이고간에 담배가 허여 되던 시절, 하물며 비행기 안에서도 뒷좌석에서 줄담배를 피던 시절. 그리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도 담배 인심만큼은 대장부였던 시절. 그 선배는 항상 담배를 얻으러 다녔다. 회사의 중견간부이고 숙녀복 MD로서 좋은 학교 출신으로 나름 이름값을 하던 그 선배는 단 한 번도 제 돈으로 담배를 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무도 몰랐겠지만 우연히 책상 안을 보게 된 나는 그 서랍 안에 다양한 브랜드의 담배를 본 적이 있어, 담배를 사서 피우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의 구걸행각은 끊이질 않았다. 담배에 대한 전설이 어느 정도냐하면 어느 날 담배를 빌리겠다고 하고서는 한 개비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담뱃갑을 쥐고서 3-4개비를 담배주인에게 주고서 나머지 담뱃갑을 가져간 적도 있다는 웃지 못할 사례도 있다는 전설의 담배 양인~
인사철이었다. 직장인들의 초미의 관심사, 승진이 되느냐 아니냐는 쥐꼬리만 한 월급에 막대한 지장뿐만 아니라, 명예에 초개처럼 온몸을 날리던 시절이라 모두들 3월 언저리엔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온갖 루머와 하마평이 돌았다. 부장 결원이 생기지 않으면 부장이 되기 어렵고 과장이 그만두지 않으면 부서별로 간부 숫자가 TO가 있던 시절이라, 승진은 개미허리만큼이나 지난한 과정이었다. 예의 이 양인도 만년과장 타이틀을 떼고 차장 승진을 목하 눈 빠지게 기다리는 무리 중에 하나였다. 30대 중후반, 그 시절 과장님들은 왜 그리 늙었을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이 나잇대는 young blood인데, 베이비붐 세대의 꼭짓점이라 경쟁자들이 즐비했고 2-3년 승진 누락은 통과의례 같은 시절이라 3년 차 연거푸 낙방하신 중년과장님은 타 들어가는 담배 마냥 늘 맘속이 잿빛이었다.
그 시절에 승진급 대상자들은 인사팀 신입이건, 초임대리건간에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려고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인사팀 직원과의 접촉에 안달이었다. 감히 인사팀과장에게는 묻지 못하고 애기들만 들볶아댔지만, 인사팀 애기들은 언감생심 고급정보에는 untouchable이었다. 3년간의 인사고과와 승진시험 그리고 임원회의를 통해 승진급이 이뤄지던 무서운 시절이었던 것이다. 대상자는 20여 명 이중에 승진자는 30%, 즉 6-7명 내외, 지난 성적표를 순위로 매겨 빨간펜으로 38선 긋듯이 유력자와 탈락예상자가 선명하게 금이 그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임원회의에서 대상자 중 탈락시킬 사람과 후보자 중에 발탁해서 조정작업을 했던 것이다. 임원들도 그들의 사람을 승진시키길 원했기에 막후 작업은 치열했으며, 인사팀은 자료 작성에 한 점의 허투루 없이 보안유지에 만전을 기하던 시절이었다.
우연이었던 의도이었던 어느 날 저녁 회식에 합류하게 되었던 그 선배는 2차를 은밀하게 제안했다. 자기 집에 가서 한잔 더하자는 것이었다. 그 선배의 집은 1기 신도시에 해당하는 중형급아파트에 살았고, 지역은 같으나 소형평형에 살던 나는 어차피 같은 방향이고 술도 거나하게 취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그의 서식처로 2차를 하러 갔다.
나는 지방 촌놈이었고 입사한 지 겨우 5년 차 인사팀대리, 그의 집은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들리는 말로는 좋은 집안 출신이었기에 출발점이 달랐던 것이다. 난 그때 처음 봤다, 5단짜리 양주장을. 숙녀복 MD를 하면서 수많은 해외출장과 무소불위 갑의 위치인 머천다이저(Metchandiser), 스타일 결정권과 수량 발주권을 가지고 있던 그는 수많은 업체로부터 받았음직한 양주병으로 5 단장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조니워커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양주인 줄 알았다. 비명횡사하신 모 정치인의 안가 연회에 쓰였다던 시바스리걸 등 이름 모를 양주병들이 화려한 자태로 5 단장에 빛나는 걸, 하지만 그들의 위치는 3단 언저리쯤. 5단의 구성은 그야말로 가장 비싼 1단으로부터 웬만한 건 3, 4 단행이었다.
호기롭게 4 단장에서 양주병을 꺼내서 나에게 권했다. 난 그 정도 급 혹은 더 아랫급이었을 텐데 인사팀대리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백그라운드가 호의를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워낙 나긋나긋하고 서울말씨 특유의 부드러움과 번쩍거리는 5 단장의 위용에 거의 영혼을 팔 뻔했지만 20고개를 무사히 마치고 귀가의 시간이 왔다.
쩝쩝거리기만 할 뿐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그에게부터 양주 한 병을 줄 테니 혹시 오늘 다 못한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자기에게 얘기해 달라는 은밀한 청탁과 함께 그는 호기롭게 5 단장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4 단장 맨 끝에 있는 양주병을 꺼내 들었다. 옜다 먹어라 이놈아!
술기운이었다. 난 한 손으로 그를 뿌리치고 2 단장에 있는 양주병에 두 손을 뻗었다. 두 병을 움켜쥐고서는 감사합니다 하고 구두를 구겨 신은 체로 그 집을 빠져나왔다.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한 눈을 뜨고 내가 현관문을 밀고 나갈 때까지 아무 말을 못 했다.
후일담 두 가지, 나는 그 집에 초대받아서 간 유일한 한 사람이었으며 담배양인에게 양주 2병 강탈했다는 얘기는 전설로 남았으며,,, 그는 그 해 승진했을까? 궁금하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