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AM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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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추며 다가올 때가 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Between you and me).

이 마법의 주문이 떨어지는 순간, 듣는 이의 마음속에는 호기심보다 피로감이 먼저 고개를 든다. 살면서 겪어보니, 저 은밀한 서두 뒤에 따라오는 말 치고 사람의 온기를 담은 ‘다정’한 이야기인 경우는 드물었다. 대개는 듣고 나면 억지로 모른 척 버텨내야 하는 지겨운 소문이거나, 누군가의 치부를 공유함으로써 가짜 연대감을 형성하려는 얄팍한 시도일 때가 많았다.

비밀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하다. 대단한 철옹성 같아 보여도, 사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시한부 생명에 불과하다.


공간의 한계는 굴의 가격표를 보면 가장 명확해진다.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 샹들리에 아래서 굴 한 개는 5유로, 우리 돈으로 7천 원을 호가하는 귀족의 음식이다. 하지만 한국의 바닷가나 동네 시장에 가면 그 돈으로 한 보따리를 사서 질리도록 까먹을 수 있다.

우리가 목숨 걸고 지키려는 비밀도 이와 똑같다. 이쪽 동네에서는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1급 기밀이라며 유난을 떨지만, 저쪽 동네에서는 이미 점심시간 안줏거리로 지천에 깔린 공공연한 사실인 경우가 허다하다. 공간이 바뀌면 정보의 가치도 폭락한다. 파리의 굴을 한국에서 비싸게 팔 수 없듯 말이다.


시간의 한계는 또 어떤가. 역사를 뒤흔든 크나큰 밀약들이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들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기밀 해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까발려진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단지 밝혀지기까지의 시차(Time difference)가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만약 우리에게 그 ‘시차’를 단숨에 좁힐 수 있는 능력, 즉 딱 5분 앞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거창하게 주식 차트를 보며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역사를 바꿀 수도 있겠지만, 평범한 일상 속에서 5분의 미래를 안다는 건 어쩌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막아주는 가장 완벽한 방어막이 될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 내게 다가와 “우리끼리 얘기지만”이라며 내 입을 막고 나를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을 것을 5분 전에 미리 안다면 어떨까. 아주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피하거나 전화를 받는 척 자리를 떠서, 누군가의 험담에 동참해야 하는 모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상황을 원천 봉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올바르게 돌아가려면, 이 5분의 마법을 손에 쥔 사람의 도덕성이 필수적이다. 진심을 다해 타인을 이해하는 데 이 능력을 쓸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비밀이 휴지 조각이 되기 5분 전에 그것을 이용해 나의 잇속을 차릴 것인가. 칼은 쥐는 사람에 따라 요리 도구가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결국 “Between you and me”라는 속삭임은, 너와 나 사이의 끈끈한 유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허무한 시간 싸움일 뿐이다. 오늘 누군가 당신에게 다가와 은밀하게 굴 한 보따리를 파리의 가격으로 팔려고 한다면,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5분 뒤의 미래를 상상해 보시라. 어차피 내일이면 다 알게 될 텐데, 굳이 오늘 그 무거운 짐을 나눠질 필요가 있겠는가. 그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털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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