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한 저녁

by 수요일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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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화란 단지 신체 기능의 저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와 정신에서 일어나는 수만 가지 현상의 종합판이다. 개중에는 서글픈 일도, 불편한 일도 있지만, 내가 겪는 노화의 현상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욕망의 소거’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거나, 갖고 싶다는 생각이 예전처럼 맹렬하게 타오르지 않는다는 사실. 나는 이것이 퍽 다행스럽다.


돌이켜보면 내 주변에는 나이와 무관하게 욕망의 불꽃을 태우던 이들이 있었다. 예전 직장에서 모시던 상사가 그랬다. 그는 인복, 재복, 자식복에 식복과 수면복까지, 오복을 넘어선 다복함을 환갑이 넘어서도 거침없이 발산하던 분이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골프 비거리는 사십 대인 나와 견주어 뒤지지 않았고, 라운딩 후에는 미식가로서 음식 본연의 맛을 탐미하며 적당한 술까지 즐겼다. 그 넘치는 활력을 보며 나는 그와의 2년 남짓 기간에 감탄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나도 늙어서 저토록 에너지가 넘치면 어쩌나, 저 욕구를 감당할 체력이 없으면 괴로울 텐데.’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육체는 정직하게 시들어가고 있다. 예순 초반에 접어든 나의 위장은 탐미보다는 소화의 안녕을 우선시하게 되었고, 세상의 산해진미도 시들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 쇠락이 반갑다. 오래전부터 인간이 입을 벌려 무언가를 먹는 행위가 왠지 모르게 애처롭게 느껴지곤 했다. 생존을 위해 꾸역꾸역 열량을 채워 넣어야 하는 그 원초적인 행위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연민 같은 것. 비록 지금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지만, 식욕이라는 본능적인 욕구에서 한 발짝 물러나니 삶이 한결 가볍다.

욕망이 빠져나간 자리는 고요하다. 김훈 작가의 산문집 『허송세월』을 몇 장 읽다가 덮었다. 책장에는 한때의 호기심과 소유욕으로 사 모았으나 첫 페이지도 열지 않은 책들이 수두룩하다. 그 책들은 내가 가질 뻔했으나 끝내 가지지 못한 지식의 무덤처럼 서 있다.


미디어에 대한 취향도 변했다. 한때는 미드니 일드니 하며 밤을 새워 다운로드하여 보고, ‘주말의 명화’가 보여주는 서사의 향연에 가슴 뛰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오히려 흥미는 가뭄이다. 복잡한 감정선이 얽히는 연애물이나 장대한 역사물, 억지웃음을 강요하는 희극은 피곤하다. 대신 서사 없이 건조하게 사건만 쫓는 스릴러물이 편하다.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뇌를 최소한으로 쓰며 시간을 흘려보내기에 그만이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수도 줄었다. 적절한 단어가 혀끝에서만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지 않아 답답할 때가 많다. 언어 능력이 퇴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굳이 말로 뱉어내야 할 만큼 중요한 생각이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귀는 예민해졌다. 생활의 소음들, 무언가 부딪치고 깨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에 신경이 곤두선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이 버겁다.


어쩌면 내 몸과 마음은 스스로 ‘절전 모드’로 전환 중인 것 같다. 소화시킬 음식도, 감정을 흔드는 이야기도, 소란스러운 소리도 줄여나가는 과정. 남들은 이를 노화라 부르며 서글퍼할지 모르나, 나는 이 조용한 쇠퇴가 마음에 든다.


무언가를 더 채우려 애쓰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들을 덤덤히 배웅하는 삶. 시들어가는 것이 이토록 편안한 일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허송세월(虛送歲月)’의 미학이 아닐까.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 아니라, 비워진 채로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가장 홀가분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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