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라는 노래가 귓가에 자동 재생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설날은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채도(彩度)를 가졌다. 어쩌면 그건 내가 어른이 되어서 세상이 무채색으로 변한 탓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설날은 조상을 기리는 날이 아니라, 1년 중 가장 확실한 '수금(收金)의 날'이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이날만큼은 빳빳한 새 운동화나 설빔을 입을 수 있었고,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꼬깃꼬깃 쥐여주시던 세뱃돈의 유혹은 실로 강렬했다. 그 돈이면 딱지며 구슬이며, 1년 치 보물은 다 살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 나는 받을 나이는 한참 지났고 줄 나이라기엔 주머니가 애매한 '낀 세대'가 되어버렸다. 민족의 대명절 설날은 그저 월급쟁이들에게 '가뭄에 단비 같은 며칠간의 연휴' 정도로 위상이 급전직하했다. 뉴스 단골 소재였던 '명절 증후군'이나 '며느리의 눈물' 같은 헤드라인도 이제는 옛말이다. 차례상은 간소화되거나 생략되고, 전 부치던 기름 냄새 대신 배달 앱 알람 소리가 그 자리를 채운다.
그렇다면 기름진 전 냄새가 사라진 도시의 설날, 그 많은 '명절 난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놀랍게도 그들은 고궁, 아니면 찜질방에 있다. 문을 연 가게가 별로 없는 도심에서 찜질방은 그야말로 문전성시, 인산인해다.
불가마 앞 풍경은 가관이다. 2평 남짓한 황토방, 수건으로 양머리를 한 사람들이 테트리스 블록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다리를 뻗는 건 사치다. 모두가 얌전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쉰다. 마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수도승들 같다. 20여 명이 좁은 공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치르는 단체 묵언수행.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뜨거운 고행을 자처하는가. 지난 한 해의 묵은 독소를 땀으로 배출하며 새해의 결의를 다지는 것일까?
압권은 화로방이다. 벌겋게 타오르는 숯더미를 밖으로 꺼내놓은 그곳엔, 30여 명의 사람이 오로지 불꽃만을 응시하며 몸을 지지고 있다. 저온 화상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마치 불을 숭배하는 고대 부족의 제의(祭儀) 현장 같다.
이곳에서의 자리는 곧 권력이다. 명당을 사수하는 것만이 나의 사명인 양, 가족들은 교대로 화장실을 다녀오며 철통 경계를 선다. "아빠, 내가 자리 맡아놨어! 빨리 와!" 낯선 이의 엉덩이가 내 자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그 비장함이란.
그 치열한 전투의 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은 식혜를 빨고, 삶은 달걀을 까고,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 먹는다. 영양 과잉의 시대, 밖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그 소박한 탄수화물들이 여기서는 왜 그리 꿀맛인지 모를 일이다.
불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식혜를 마시는 이 아이러니. 어쩌면 우리는 차례상 앞에서 절을 하는 대신, 숯가마 앞에서 땀을 흘리는 것으로 새로운 제사를 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뜨거운 열기로 몸을 데우고, 소박한 음식을 나누며, "아이고, 시원하다"라는 역설적인 감탄사를 내뱉는 행위.
비록 세뱃돈 봉투는 없지만, 땀 한 바가지 쏟아내고 마시는 살얼음 동동 뜬 식혜 한 잔. 어쩌면 이것이 팍팍한 현대인이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현실적이고 따뜻한 '세뱃돈'이 아닐까 싶다. 올 설에도 나는 숯불 앞에서 묵언수행을 하며, 내 안의 묵은 스트레스와 작별을 고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