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쓰다

추억 저정소를 서성이다 건져 올린 캄보디아 이야기

by 슝이모

새소리에 잠을 깼다. 나를 깨운 새소리는 새가 우짖는 소리가 아니다. 새가 내 방의 창문을 쪼아대는 소리다. 창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거울 재질로 되어있어 새벽이 되면 집 마당 새들이 창에 비친 제 모습에 법석을 떨었다. 혼자 사는 외국 여자를 위한 집주인의 선심이 새들에게는 훌륭한 놀잇감이 된 것이다. 유리창을 콕콕 찧어대는 새소리는 싫으나 좋으나 기상 알람이 되었다. 하루가 일찍 시작되는 캄보디아 시골 생활에 장단을 맞추려면 이른 새벽의 기상은 유용하다. 한 시간여의 자전거 출근길에 올라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동트기 전 길을 나서려면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출근복은 단출하다. 소매가 긴 하얀 셔츠와 통 넓은 긴 바지, 챙이 넓은 모자. 열대 태양에 맞서는 전투 복장이다. 잠에서 막 깨어난 옆집 소들의 음머음머 저들끼리 주고받는 아침 인사가 담장을 타고 넘어온다. 이제 출근할 시간이다.


간밤에 쏟아진 비가 곰보투성이 도로 여기저기에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위로 자전거가 꿀렁꿀렁 굴러간다. 바람에 제법 선선한 기운이 스며있어 콧노래가 절로 난다. 푸른 논밭 지평선 위로 표표히 해가 떠오르고 마을은 그제야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마당을 쓸고, 가게 문을 열고, 일터로 가는 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대로에 출현한 생뚱한 자전거를 힐끔거린다. 여전히 잠기운이 서린 그들의 부스스한 얼굴에 빗살무늬 햇살이 박혀 주홍빛으로 물드는 시간. 캄보디아 시골 마을에 새 하루가 열렸다.


열대야로 잠 못 드는 새해를 캄보디아에서 여러 차례 보내던 시절이었다. 발전이 더딘 타국에 파견되어 그곳에 필요한 것들이 무언지 헤아리고 사업화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남 돌볼 만큼 잘살게 된 내 나라 정부의 배려가 내 직업이 된 셈이다.

하루 일과는 캄보디아의 한 마을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생계를 어떻게 꾸리고 있는지, 어떤 농작물을 재배하고 어떤 가축을 키우는지, 집안 살림살이는 무엇이 있고 없는지, 음식 조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 어떤 물을 음용하는지, 용변 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마을 학교 시설은 멀쩡한지, 학생들은 학교에 잘 나오는지, 교과서와 교복은 갖추고 있는지.


마을 관찰은 시골 마을이 감내하고 있을 불편함의 가짓수를 덜어내기 위한 일의 절차다. 수개월째 한 마을을 드나들며 하는 일이라고는 새로운 정보를 관찰일지에 적는 게 전부였다. 아스팔트 대로에서 가지를 친 흙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야 나오는 마을은 외부인의 발길이 닿지 않아 고립무원했다.

마을로 들어가기까지 직선으로 뻗은 흙길을 자전거로 달리는 기분은 꽤 근사했다. 길 양옆으로 녹색 평야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고 논밭 구획선을 따라 야자수가 땀땀이 박혀 있어 마치 야자수 모양 음표가 새겨진 푸른 악보 속을 거니는 것만 같았다.


마을의 아침은 농밀하게 내려앉은 열대 하늘의 무게에 소음마저 눌린 듯 늘 고요했다. 해가 뜨기 무섭게 논으로 공장으로 노동 인력들이 빠져나가 마을에는 노인과 아이들만이 남아있었다. 자전거 소부대를 만든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돌개바람을 한 줌 일으키며 나를 지나쳤다. 마을에는 초등학교만 있었으므로 중고생 아이들이 학교가 있는 옆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평평한 논이 끝나는 지점에 망고, 바나나, 코코넛, 파파야 나무, 이름마저 달달한 과실수가 빽빽하게 늘어서서 마을의 초입을 알렸다. 3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에는 벽돌로 쌓아 올린 집이 몇 채 없었다. 나무와 마른 짚으로 벽을 세우고 슬레이트, 양철판으로 지붕을 얹은 집들이 주를 이루었다. 대나무를 듬성듬성 꽂아 옆집과 도로와 구분을 둔 것이 울타리라 집 안 사정은 밖에서도 훤히 보였다.


“밥은 먹었어?” 할머니들의 인사말은 빠짐없이 ‘밥’으로 시작되었다. 그냥 하는 인사가 아니다. 혹여 “아직이요.”라는 대답이라도 들을라치면 할머니들은 거북 등껍질처럼 거칠고 두툼한 손으로 나를 잡아 집 마당으로 끌어들였다. 꼭두새벽부터 찾아오는 한국 여자가 끼니를 거르나 싶어 마음이 쓰인 걸 테지만 마을 인심이 그랬다. 부모가 아침 일찍 일하러 떠난 이웃집 아이들과 다치고 병든 이웃이 한 끼라도 거를 새라 자기들 밥 지을 때 쌀 한 홉을 더 부어 끓였다. 넉넉지 않은 그네들 살림을 축내는 것 같아 밥 먹고 가라는 권유에 손사래를 치던 한때도 있었다. 차츰 마을과 사람들 얼굴이 익고 마음이 오가면서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텃밭에서 따온 채소로 만든 한 두 가지 찬이 전부인 소박한 밥상 앞에 앉으니 옆집 뒷집 할머니들이 때아닌 웅성거림을 듣고 찾아왔다. 할머니들의 말은 금이 간 바가지에서 물이 새듯 쉼 없이 질질 새어 나왔다. 이 마을에 오기 전부터 이미 여러 해를 캄보디아에서 살며 배운 캄보디아어는 이 마을 억센 지역어 앞에서 종종 갈피를 잃었다. 그럴 때면 옆에 있던 꼬맹이들이 보다못해 통역관이 자처하고 나섰다.

대로에서 끌어온 전깃줄을 갈라 이 집 저 집이 나눠 쓰는 처지라 전기가 귀했으니 선풍기 바람은 호사였다. 할머니들은 바나나잎으로 엮어 만든 부채로 땀을 식히며 마을 대소사를 줄줄 읊어댔다.

누구네 집 부부는 베트남으로 일하러 떠났고, 누구네 집 아이는 말라리아에 걸렸고, 누구네 집 남편은 이웃집 여편네랑 바람나 도망갔고, 누구네 집 청년은 공장에서 번 돈으로 돼지를 사들였고. 마을의 속살이 할머니들의 벌건 입을 통해 살갑게 드러났다.

동네 노인들의 입안은 늘 벌겠다. 담배 역할을 하는 붉은 식물을 노상 질겅질겅 씹고 있는 이유였다. 얼마만치 씹다 홱 뱉어낸 식물의 붉은 사체가 집 마당과 길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는 건 흔한 일이었다.


학교 갈 시간이 지났는데 한 아이가 제 키만 한 괭이를 질질 끌고 아버지 뒤를 따라간다. 물이 천지사방에 흐르는 우기가 되니 일손이 모자란 논밭에 고사리손까지 보태진 터다. 교육이 최우선인 엄격한 나라에서 온 사람답게 적어도 초등학생은 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냐고 말했다가 돌아오는 답에 머쓱해졌다.

“소작농들이 제때 벼수확을 못 하면 그 뒷감당은 누가 해주나.”

마을 어귀 드넓은 평야를 이룬 논의 대부분은 주변 마을 부자들의 논이었고 마을 사람들 절반 이 소작농이었다. 이곳엔 엄동의 농한기는 없지만 건기가 있다. 저수지가 변변치 않은 마을에서 소작농들이 살아남으려면 땅이 마르기 전 부지런히 삯을 벌어야 했다. 그런 이들에게 아이들 교육은 강제가 아닌 선택일 따름이었다.


한번은 마을 이장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삼모작 벼농사로 수확을 늘릴 수 있는 천혜의 땅에서 마을 사람들은 도대체 왜 삼모작을 하지 않는 거냐고. 그때 이장은 기가 찬다는 듯 대꾸도 안 했다. 삼모작을 하지 않는 건 논을 돌볼 손이 모자라고 물이 없어서였다. 무지하면 질문이 무례해진다. *밥이 없으면 빵을 먹으면 되지 않냐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례가 가난에 대한 무지였듯이.


찬을 축냈으니 염치는 있어 자전거 바구니에 든 구급약 통 속에서 파스를 꺼냈다. 할머니들은 “아이고, 귀한 한국 약이네.” 반기며 아픈 등허리를 훌렁 까 보였다.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았으니 노인들의 등허리는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야위고 휜 등판에 파스를 손바닥으로 펴 바르고 있으면 마을의 생생한 역사서를 손으로 더듬어 읽는 것 같아 경건해졌다. 귀한 파스에 대한 답례라며 할머니들은 열대 과일을 안겨주었다. 한국에서는 고가라 살 엄두를 못 내는 망고도 코코넛도 마을 인심으로 거저 얻었다.


길에서 마을 이장을 만났다. 구순열을 방치했던 탓에 입술이 위로 말려 올라간 이장의 멀뚱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수개월을 만난 친분의 결과다. 이장은 손에 들고 있던 설문지를 흔들어 보였다. 일전에 내가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해주십사 부탁했던 설문지였다. 이장은 그 설문 내용을 고쳐서 다시 만들었다고 했다. 새로 작성된 설문지에는 글로 쓰여있던 ‘만족한다. 그저 그렇다. 만족하지 않는다’ 부분이 글자 대신 ‘웃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우는 얼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주민들을 고려한 이장의 마음 씀씀이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쓰는 방법을 마을을 오가며 깨친다. 마음을 쓴다는 건 능동형이다. 마음이 쓰이는 건 그저 저 혼자 그러고 만다. 움직임이 없다. 반면 마음을 쓰는 행위에는 움직임으로 연결되는 힘이 들어있어 수고스럽다. 마을이 마음을 쓰는 모습은 이랬다. 남편 잃은 젊은 미망인의 집을 들락이며 그 마음을 살피고, 나무에서 떨어져 몸 반쪽을 못 쓰게 된 이웃의 끼니를 해 나르고, 하루아침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마을 전체가 돌보았다. 마을은 줄기차게 마음을 쓰는 중이었다.

몇 명, 몇 마리, 몇 개. 숫자들로만 적혀있던 관찰일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과 이야기로 채워졌다. 일지 속으로 한 마을이 산 채로 들어와 제 둥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공여와 수혜라는 딱딱한 보고서용 단어가 때로는 민망했다. 공여자들을 대변해 호기롭게 일을 맡았지만 나는 되레 삶을 훈수 두는 수혜자들 앞에서 쩔쩔매기 일쑤였다. 보고서를 매운 빈곤과 가난의 언어도 미안했다. 마을을 통해 어렴풋이 배움이 생겼다. 모두가 부자인 곳에서는 부자가 없듯 모두가 가난한 곳에서는 가난이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없던 것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도 엄존한다는 것을. 이 마을에서 가난과 불편함은 외부인들이 안겨 준 발명품에 불과했다.


일전에 가족사진을 인화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아이가 있어 그날 그 아이 집으로 찾아갔다. 그 아이를 맨 처음 보았던 건 마을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당시 나는 빗물에 진흙탕이 된 길 위에서 설렁설렁 자전거를 끌며 걸어가고 있었다. “봉스레이(언니)!” 소리에 발을 멈췄다. 울타리 없는 집 마당에서 한 여자아이가 빨래를 널다 말고 나를 불렀다. 조막만 한 얼굴에 크고 뚜렷한 눈과 날렵한 콧날, 허리까지 땋은 갈래머리, 균형 잡힌 몸에 붙은 길쭉한 팔다리. 예쁘지 않은 곳 하나 없는 열네댓 살 남짓 여자아이였다. 입고 있던 낡고 바랜 옷도 그 아이의 출중한 인물을 감출 수는 없었다. 아이가 내게 밥을 먹었냐고 물었다. 헛헛하던 차였지만 대답을 머뭇거리자 아이는 이제 막 라면을 볶아 먹으려 했다며 같이 먹자 한다. 이곳 사람들은 끼니를 간단히 때울 때 한국 라면 반 정도 크기의 동남아 라면을 뜨거운 물에 불렸다가 볶아먹는다. 이 어여쁜 아이가 궁금하기도 하여 선뜻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는 옆 마을 중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날은 오후반이라 아직 학교 갈 시간이 아니라고 했다. 교실 수가 부족한 캄보디아 시골 학교에는 우리네 옛 학교처럼 오전, 오후반이 존재했다.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막상 외부인을 집에 들여놓고는 어떤 말을 건넬지 몰라 막막한 듯 보였다. 내 편에서 이것저것 물었다.

아이는 공부가 참 좋다고 했다. 특히 영어가 재미있다고 했다. 나중에 커서 영어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셔서 공부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도 했다. 아이가 볶아낸 라면에는 텃밭에서 방금 딴 공심채가 듬뿍 들어있어 유독 맛났다.

그 이후로 아이가 집에 있는 시간에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면 그 애는 나를 불렀고 라면을 볶아냈다. 라면을 먹고 나면 나는 아이에게 영어를 몇 마디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쓰는 사이가 되어갔다.


어느 날에는 아이가 물어왔다. 가족사진을 찍어줄 수 있냐고. 그러고 보니 그 집 벽에는 사진이 빼곡히 걸린 여느 집들과 달리 형체가 희미한 사진 두어 개가 걸린 게 전부였다. 흔쾌히 카메라를 꺼내 들자 할머니, 엄마, 오빠와 함께 젖먹이 동생을 안고 아이가 마당에 나란히 섰다. 수줍음이 내력인 듯 가족들은 하나같이 경직된 얼굴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사진을 인화하는 대로 가져오겠다고 했으나 한동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계절이 우기의 중심으로 들어서자 하루가 멀다 하고 몰아치는 폭우에 마을 들어가는 흙길이 물에 잠긴 것이다. 땅이 마르기를 기다려 겨우 마을을 찾은 날이 그날이었다.


오랜만에 그 아이를 만날 생각에 입가가 하늘 위로 실룩거렸다. 아이는 그 예쁜 눈을 반짝이며 가족사진을 오래오래 들여다보겠지. 약속을 지켰으니 라면을 더 많이 볶아 먹자 당당하게 말해야지. 공심채도 냄비 가득 넣어달라 말해야지. 그러면 아이는 “능하으이!(그럼요)” 소리치곤 신나게 라면을 볶아대겠지. 자전거를 구르는 발이 춤을 추듯 페달을 밟았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마당 평상에 앉아 젖먹이를 어르고 있는 그 애 엄마만이 눈에 띄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아직 오지 않았냐고 묻자 아이 엄마는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 애 오빠가 다치는 바람에 집에 돈 벌어다 줄 사람이 없어졌다고. 그래서 그 애를 먼 마을 봉제공장으로 보냈다고. 거기에서 기숙하며 지내게 되었으니 집에는 긴 명절에나 올 거라고. 그 애 엄마의 말이 다리 힘을 모조리 앗아버려 평상 모퉁이에 한참을 앉아있어야 했다. 이것이 마을의 현실이었다.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다 했던 그 신산한 현실이 마음을 쓰던 아이의 것이 되니 달리 보였다. 마음을 쓴 만큼 마음이 아렸다.


사진 한 장으로 남은 그 아이와의 추억을 가끔 떠올린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니 그 아이는 이미 성인이 되었겠다. 영어 교사가 되었을까? 그리되었다면 좋겠지만 그리 아니 되었어도 괜찮다. 그 무엇이 되어있던 그 아이만 좋다면 다 괜찮다. 그 마음을 알릴 길이 없으니 나는 그저 먼 이국 하늘 쪽을 바라보며 한때 마음을 썼던 이의 행복을 바랄 뿐이다.


*마리앙뜨와네트의 말은 그녀를 배척했던 대중들의 헛소문에 불과했다는 걸 지적해 준 지인의 충고를 반영해 이 문장은 삭제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