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철십자가, 치유의 이름 - 2

RABANAL ~ MOLINASECA, 26th Day

by 이작


팻 일행은 넓은 공터의 한쪽에서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이미 도착한지 30분이 훨씬 지났다. 그들은 내가 돌 무더기를 절뚝절뚝 내려와 장갑을 바꾸고 마지막 준비를 마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기다리고만 있었다. 내려가는 길에서도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저 나 혼자 감정을 추스를 수 있도록 단지 같이 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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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팻이 제일 앞장을 섰고 그 뒤로 나와 새라, 마지막으로 클레어가 따라 왔다. 새라는 항상 클레어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내 주변에서 조용히, 함께 걸었다.


새라..
응?
고마워.
뭐가?
그냥…… 같이 걸어줘서.

그녀는 한번 씨익하고 웃어 보인다. 비버를 닮은 커다란 하얀 이가 드러났다. 팻은 어느새 본인의 페이스대로 저 앞으로 멀찍이 앞서 간다. 이 사람들이 참 고맙고 정겨웠다. 내가 감정을 추스르고 스스로 입을 뗄 때까지 아무 방해도 하지 않고 내 스스로의 시간을 지켜준 것이다. 그저 말없이 두세 발자국의 거리를 두고 앞으로 뒤로 시계추처럼 반복할 뿐, 타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건드리는 법은 없었다. 여태까지 이 길을 함께 걸어 준 팻, 새라, 클레어 모두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들이다.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개입하는 한국과는 달리, 이 사람들은 내가 혼자서 모든 것을 끝마치고, 정리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주고 필요한 시간을 만들어 줄 뿐이었다. 어느새 시멘트로 포장된 좁은 도로가 보이기 시작하며 마을이 시작됐지만, 새라와 나눈 이 몇 마디가 내려오는 동안 들렸던 세상의 모든 언어였다.


이상하게도, 지금은 마음속에 더 이상 슬픔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감정이 정리되는 것과 같은 보폭으로 마음이 가벼워 졌다. 신기하다. 몇 년간 한곳만 계속 찌르고 있던 가시가 순식간에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마치 철십자가 아래 모든 슬픔과 세상의 짐이 아직 그대로 바닥에 코를 박고 엎드려 있는 것처럼 다리도 점점 가벼워 진다. 그 동안 걱정했던 것처럼 내가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었고, 그 시간을 위해서 준비 할 것도 없었다. 단지 그곳에서 내 마음에 솔직해 지니 무엇인가가 그 마음을 어루만져 깨끗이 비워 준 것 같았고, 그로 인해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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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은 해발 1,500미터로부터 급경사 내리막으로 되어 있어서 산들이 겹겹으로 겹쳐져 있는 모습을 구름과 비슷한 높이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양쪽 시야를 가득 채우는 산 위로 구름이 천천히 지나간다. 그 바로 아래 거대한 산 표면에 평화롭고 조용하게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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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핑 돈다. 이번엔 슬퍼서가 아니라 처음 느껴보는 이런 편안하고 잔잔한 감정 때문이다. 어느덧 팻은 경치가 좋은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 일행들을 모두 불러모아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치를 감상했다. 난 사진을 찍다가 잠시 눈을 돌려 마치 사람을 느끼듯 그 풍경을 느껴 봤다. 놀랍게도, 그 풍경도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 자유로움, 편안함, 행복함 이런 감정들이 포함돼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내가 알고있는 언어로는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숭고한 감정이었고 다쳐서는 안될 표현이었기에 왜곡되기 쉬운 사람들의 언어로는 정리가 될 수 없었나 보다.


주머니에 손을 넣자 돌 하나가 만져졌다. 며칠 전 새라가 건네 줬던 아일랜드의 하얀 돌이다. 난 그 돌을 만지작거리다 안 주머니 깊숙히 다시 찔러 넣었다. 새라의 근심을 상징하던 돌맹이가 이제는 일행들과의 만남을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상징이 되었다. 마음도 가볍고 홀가분했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조각나 있던 마음도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제 자리를 찾아 빠르게 맞춰지고 있었다. 기억의 끝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돌맹이를 그곳에 내려놓은 듯 이젠 모든 것이 소중했다.






오늘 묵어갈 마을인 몰리나세카(Molinaseca)의 입구에는 커다란 성당이 버티고 있었다. 그 곳 마당에서 이미 수프를 걸쭉하게 끓여 놓고 바게트 빵을 찢어서 먹고 있는 조와 그 아들들이 보인다. 언제나처럼 검은 윗도리에 오랜지 색 바지를 입고 밝게 웃고 있고, 휴고와 라이치는 어느새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고 남자어린이 특유의 칼싸움을 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항상 힘이 되고 마음속까지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욕심 많은 라이치가 오늘 이 마을에서 멈추지 말고 더 가고 싶어 했지만 식사 후 마을로 들어가며 생각해 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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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얼굴만 봐도 뛰어와서 안기는 아이들이 예쁘고 친숙하다.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우리 일행이 먼저 마을로 들어섰다. 폭이 넓은 강을 건너 마을로 진입 했는데 다리를 건너자 마자 바로 앞의 바에서 커피 한잔을 들고 팔을 휘휘 저어 반갑게 맞아주는 팀 할아버지가 보인다. 반가웠다. 나이는 팻보다 열살이상 많고 걸음도 편치 않지만 항상 만날때마다 웃으며 꿋꿋이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걷는 모습이 꼭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팻과 같이 힘찬 걸음이 아니라 매번 다리를 떼는 것이 어려워 보일 만큼 힘든 걸음걸이였다. 그런데도 항상 사람들을 보면 웃으며 반긴다. 그리고 마술이라도 부리듯 항상 우리 일행보다 앞서 있었다. 그런 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마을 길로 들어서자 그 동안 까미노에서 만나 사귄 사람들의 대부분이 함께 있는 것이 보였다.

서로 알아가며 이 길을 걸어오다보니 모두 한 그룹인 것 처럼 친해져 버렸다. 작은 마을에 그나마 커 보이는 길이 하나밖에 없다 보니 짐을 풀고 난 모든 순례자들이 하나밖에 없는 길 주변 바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캐나다 퀘벡에서 딸과 함께 온 아주머니, 프랑스에서 손녀와 함께 온 할아버지등 그 동안 길에서 크고 작은 소소한 에피소드를 함께 만들던 사람들이었는데 모두 함께 테이블에 앉아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반겨주고 있었다. 마치 ‘에밀쿠스트리차’의 ‘언더그라운드’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모든 등장인물들이 손을 잡고 춤추며 화합하는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강가 옆 공터에서는 시끌시끌하게 행사를 위한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순례자들을 흉내 내어 가슴에 번호를 달고 이 마을을 한 바퀴 도는 행사였다. 순례자의 입장에서 카페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그런 행사를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난다. 무슨 생각인지 그 행사에 등록해서 짐까지 메고 함께 뛰고 있는 진짜 순례자들도 볼 수 있었다. 이 길의 중간쯤 만나 거침없는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여자 순례자들에게 무례하게 굴던 벨기에에서 온 순례자도 그 무리 중에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말도 섞기 싫어서 매번 자리를 피해왔었지만 이제는 서로 아는 척을 하며 서로의 무사까지 빌어주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잠시 후 한국에서 온 것을 알리듯 태극기를 어깨에 붙이고 비싼 등산복과 각종 장비들로 완전 무장한 한국인 무리가 나타났다. 한국에서 만났으면 멋있었을 복장이었지만 난 결국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잠시 어디로든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름 개성이고 문화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의 눈으로는 허영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마을 끝에서 6명이 함께 사용하는 넓은 방을 잡았다. 우리 일행 이외에 2명이 더 있었지만 우리가 잠든 후 들어와 일어나기 전에 빠져 나가 누군지는 결국 볼 수 없었다. 식사를 하고 돌아와 짐을 풀고 음료 몇 개를 사서 올라가는데 마침 조 일행이 1층 입구에 들어오고 있다. 강물을 본 휴고와 라이치가 마음을 바꿔 이곳에서 놀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날 휴고가 다리 경련으로 저녁식사 시간에도 맘껏 놀지 못하고 힘들게 버티는 모습을 보게 됐다.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통들을 잘 참아 견디는 게 대견하다.






오늘 걸어온 길은 새벽에 산을 급격하게 오른 만큼 다시 내려오게 되어 있어서 나도 역시 다리에 무리가 된 것 같았다. 저녁 먹을 때부터 경련이 나기 시작 했지만, 오랜만에 가벼운 마음으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처음 까미노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당을 만날 때마다 세요를 받으려고 들어갔는데, 그때마다 기도를 해보기로 결심 했었다. 하루에도 몇개씩 지나치는 성당에 들어가 모든 것을 내려 놓고 기도하며 하루하루 걸었던 그 날들이 마치 오늘을 위해 준비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