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수의 분실(分室)'.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메모광이라는 수필에 나왔던 표현이다. 작가는 자신의 광적인 메모 습관을 뇌수의 분실을 내었다고 표현하였는데, 이 때는 이 표현이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만해도 다이어리는 꾸미는 것이 재미있어서 썼던 것이고, 필기는 수업 내용 중 교과서에 없는 내용을 보충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내 이름이 박힌 명함이 생기고, 그 명함에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는 패기 넘치는 신입사원이 되었다. 지금이 오전 8시 반인지 저녁 8시 반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늘 바쁘게 일하는 분위기 속에서 챙겨야 할 것들을 깜박하기 시작했다. 동기와의 점심 약속을 잊어버려 민망한 사과를 해야 했고, 회의 시간과 장소를 혼동해 그야말로 ‘멘탈 붕괴’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아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일단 가장 먼저 스마트폰에 있는 캘린더 앱으로 일정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일정 관리뿐만 아니라 내 생각을 정리할 때도 메모는 유용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업무는 점점 늘어만 갔고 그로 인해 비업무적인 고민과 To do list는 내 머릿속을 그저 스쳐 지나가 해결되지 못하고 그대로 뒤죽박죽 쌓여만 갔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쌓여서 넘치려 할 때면 나는 펜 한 자루와 A4용지 한 장을 꺼내서 끄적이기 시작했다. 표를 그리거나 그냥 생각나는 대로 쭉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다 보면 머릿속의 생각들도 어느새 정리가 되었다. 소중한 우리 딸이 태어나고, 나에게 ‘엄마’라는 임무가 추가로 부여되었다. 이로 인해 나의 비업무적 고민과 To do list들은 대부분 ‘아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더 상세하게 움직였다. A4용지를 꺼내 생각과 할 일들을 정리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내 스마트폰에 있는 노트 앱에는 아이의 이름으로 시작되는 새 노트들이 점점 늘어갔다. 즐거운 주말이 기다리고 있는 매주 금요일. 회사 책상에 앉아 남편과 아이와 함께할 주말 계획, 주말에 아이 먹일 식단을 고민하며 끄적이는 것이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메모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워킹맘에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우리 아이가 주는 행복을 기록해 두는 용도로도 활용되고 있다. 날 보고 웃으며 옹알이하고, 스스로 잡고 일어나서 뿌듯해하던 모습, 처음으로 볼 뽀뽀를 해준 날, 응가를 못 해 며칠을 마음 졸이게 하다가 시원하게 응가를 했던 날까지. 사소하지만 그 시기의 아이만이 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잊고 싶지 않아서 아이의 성장 기록을 시작했다. 아이란 존재는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경험을 하게 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해 주면서도 나에게 공들여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잘 허락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그때그때 있었던 일들과 들었던 생각, 느낌을 간략하게나마 기록한다. 아이와 놀다가 급 심쿵!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며 뭔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 때 ‘이건 기억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도구를 찾는다. 노트 PC나 메모지가 될 때도 있지만 아이의 스케치북이 되기도 하고 영수증 뒷면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그날의 행복한 순간을 '무사히' 기록했을 때 자칫 내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시간을 잘 간직했다는 안심을 하게 된다. 하물며 '아! 잘 보관했으니 이제 행여 잊어버리더라도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뇌수의 분실이 아닐지. 이제는 쇠퇴하는 기억력에 뇌수의 분실을 둘 수밖에 없었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적극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기록이 쌓이면 뭐든 된다.’
N사 블로그 앱에 접속할 때 뜨는 문구이다. 틈틈이 적어둔 메모를 모아 비공개 블로그에 정리하고 있다. 육아휴직 기간에는 매주 1주일 치씩 정리하다가 복직 초기에는 2주마다, 요즘은 1달에 한 번도 쉽지 않다. 블로그에 정리하지 못한 기간이 1달이 넘었는데 그동안 적어둔 나의 메모 개수가 별로 없을 때 ‘아, 이번 달도 치열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가끔 블로그에 정리하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지만 이미 쌓아둔 지난 30개월의 시간을 가끔 꺼내보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차곡차곡 쌓아둔 기록들이 나중에 우리 세 가족에게 큰 선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메모는 이제 나의 삶에서 꼭 필요한 중요한 일상이자 나의 든든한 '기억 곳간' 같은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