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음 ‘양가감정’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마음 ‘양가감정’
나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00 선생님.... 하면 한다면 하는 사람이지'라고 말을 한다. 몇 개월 전 영어실력이 없다는 생각에 '어학연수 가고 싶다'고 뱉었을 뿐인데 아들이 화들짝 놀라며 누나와 동생에게 나를 일러바쳤다.
아들 1: 엄마가 글쎄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어학연수를 가겠데
누나: 설마....
아들 1: 진짜라니까. 누나는 엄마 몰라? 진짜 마음먹으면 한다니까? 얼른 말려봐
누나: ........
아들 1: 엄마! 엄마는 진짜 이상해. 도대체 왜 그래. 자식들은 가만있는데 왜 엄마 혼자 어학연수 가고 싶은 거야? 여기 집 앞에 상담센터 있더라 상담 좀 받고 와. 좀 치료 좀 받고 와.
엄마(나): .....
지금 이 순간 나는 조용히 내게 속삭인다. 뭐라고 속삭이냐면....
‘아.... 포기하고 싶다.’
여러 번 물었다.
‘한 꽂샘... 너는 어쩌고 싶어?’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넌 어떡할 건데?’
나는......그냥 포기하고 싶다....라는 말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상담사로 제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긴 학업과정과 끊임없는 상담 수년의 과정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마치고 나서 제대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면 오산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의 학업에 집중하는 동안 앞만 보고 마라톤 달리기를 해온 기분이다. 이제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고 싶어서 작년부터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 거예요’ ‘글을 쓰며 살 거예요’ ‘심리에세이도 쓰고, 자녀양육서도 쓰고...’ 흥분하며 왜 그리 설쳐댔을까? 갑자기 후회막심이다. 다 포기하고 싶다. 내가 포기만 하면 내 삶은 아주 평탄하다. 그동안 해놓은 공부, 자격증, 학위가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조금만 벌고 조금만 쓰기로 마음먹으면 그 만큼만 누리면서 살 수 있다. 더 이상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되고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프리랜서로 상담 케이스를 내가 조절하며 시간적 여유를 갖고 살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글을 쓰겠다며 선포하여 부담감만 높여놨을까? 생각해본다. 이런 나의 태도가 때로는 후회도 되었다가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양가감정’이란 게 있다. 양가감정은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있어서 서로 반대되는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양가감정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근본적인 자기 신뢰가 얕은 경우 이러한 양가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슬리 게 된다. 어떠한 선택을 하기 힘들어하고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에도 적잖은 고민에 시간을 낭비하기도 한다. 중요하지 않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중요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으며 자신에게 해가 되는 친구를 곁에 두려는 마음과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초래된다.
자!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내가 가진 생각이 나쁜 생각인가? ‘포기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말이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다.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든, 꿈같은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라도 말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람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햇볕은 그림자를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은 고통 속에 얻은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나 스스로는 알 수 있다. 지금의 내 표현처럼 ‘포기하고 싶다’라고 말해도 된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주고 싶다. 그래도 된다는 걸 나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다시 앉아 글을 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포기, 하기 싫은, 힘듦에 대해 스스로 알아주는 자세는 스스로를 향한 격려와 지지와 다를 바가 없다.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힘들면 때려치우라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내 무의식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자. 그렇게 말하고 나면 신기하게 다시 힘이 생긴다. 포기하고 싶다면 포기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러고 나면 다시 해볼까?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든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울림에 귀를 기울일 때 일의 능률은 올라간다. 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일은 재미가 없고 힘만 들뿐이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는 내 모습에 사표를 내 던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으로 내가 하려 했던 목표를 이룰 수 있다. 자녀를 키우는 엄마가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는 것처러 말이다. 이럴 경우 자신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잠시 동안의 여가시간이라도 확보해야 한다. 지나치게 내가 하려는 목표에 집중한 나머지 흐트러지는 모습을 회피할 때 글쓰기에 대한 나의 애정을 사라지게 될 게 뻔하다. 성숙한 삶을 위한 긍정적 마음의 태도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스로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으로부터 싹튼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아이들을 유난히 이뻐하는 사람이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가 ‘아이들 보는 거 너무 힘들어’라고 말을 해도 ‘애들 좋다고 네가 선택한 거잖아’라고 하지 말자. ‘막상 해보니까 힘들기도 할 거야’라는 정도로만 해두자.
여행이 좋아서 가이드가 된 사람이 ‘여행객들 상대하는 거 너무 스트레스야’라고 하더라도 ‘여행 좋다고 스스로 가이드가 된 건데 암말 말고 하지’라고 하지 말자. ‘여행 좋아하는 거랑 여행객 상대하는 거랑은 많이 다를 거야. 힘들겠네’라고 토닥여주자. 글쓰기에 전념 중이던 작가가 ‘아... 글쓰기 너무 힘들어’라고 할 때 ‘그러니까 그렇게 힘든 일을 왜 해’라고 하지 말자. ‘창작하는 일이 힘들긴 하지.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을 하잖아’라고 말해보면 어떨까?
누구든 안다.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해서 가는 길인 것을... 다만 그 길이 좀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것임을 읽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준다면 그 말 한마디만큼 다시 걸어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나는 포기하고 싶다. 내가 하려는 이 모든 일들을 안 하고 싶다. 그러나 하고 싶다. 이 무슨 말장난이냐고 하겠지만 이러한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허락해주자. 그런 다음 타인도 넉넉히 허락해주자. 투정 부리면 어떠하랴. 좀 말투가 삐죽거리면 어떠하랴. ‘아 저 사람이 지금 힘들구나’라는 밑 마음을 읽고 따뜻한 마음 한 자락 내어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