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이면 눈을 비비며 이불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나선다. 서호천을 따라 서호 한 바퀴를 돌고 집으로 돌아오면 얼추 10km가 찍힌다.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에 10km를 뛰는 것은 주말의 나른함을 깨우는 나만의 루틴이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쉬고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운동화에 발을 담그는 내 자신이 가끔 대견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 뿌듯함은 아침 거울 속 부은 얼굴을 마주할 때 어제의 후회가 사라지기 바라는 마음일 지 모른다.
달리기 전 삼성헬스를 켜고 워치 설정을 확인하는 것은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심박동수와 현재 스피드를 1km마다 알려주도록 설정하면 준비는 끝난다. 보통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책 리뷰 영상을 들으며 달리다 보면, 중간중간 기계적인 목소리가 나의 상태를 보고한다. 비서도 없고 매니저도 없는 내 인생에 유일하게 나를 관리해 주는 고마운 10km의 조력자다. 그 목소리는 가끔 내가 게을러지려 할 때 채찍질을 대신하기도 한다.
러닝 기록에 엄청난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키려 한다. 그래도 대회에 나가면 1시간 안쪽으로 들어오고 싶어 평상시 1km당 6분 20초 내외를 유지하려 노력한다. 이 페이스를 유지하려면 웬만하면 중간에 쉼 없이 호흡에 집중하며 정해진 거리를 완주해야 한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 것이 러너의 미덕이라 믿는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호흡을 고르며 서호 산책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산책로 한편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호수가 아닌, 호수를 등진 반대편 논가를 향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전문적인 커다란 망원경이 아닌, 동네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귀여운 쌍안경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 같으면서도 어딘가 엉성해 보여 웃음이 났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조류 전문가들이 아닌 평범한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었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무언가를 열심히 관찰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평소라면 기록을 위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그날따라 그들의 고요한 열기에 이끌려 결국 발걸음을 멈췄다. 나의 소중한 평균 페이스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지만 왠지 멈춰야만 할 것 같았다.
"저... 실례지만 무엇을 보고 계시는 건가요?" 땀을 뻘뻘 흘리며 뜬금없이 질문을 던진 내게 한 분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큰기러기예요. 저기 논가에 내려앉은 거 보이죠? 아주 귀한 손님입니다." 기러기면 기러기지, 큰기러기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큰기러기는 멸종 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된 아주 귀하신 몸이었다. 보통 기러기라고 하면 우리는 쇠기러기나 큰기러기를 통칭해서 부르곤 한다. 쇠기러기는 배에 검은 줄무늬가 있고 부리가 분홍빛을 띠는 반면, 큰기러기는 부리가 검고 끝부분만 주황색 띠를 두른 것이 특징이다. 이름에 '큰'이 들어가서 덩치가 아주 클 것 같지만, 사실 쇠기러기와 덩치 차이는 크게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름값 못하는 덩치지만 그 희소성만큼은 확실히 이름값을 한다.
그렇다면 이 귀한 손님들이 왜 하필 서호 옆 논두렁을 찾았을까. 큰기러기는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를 피해 10월 중순부터 우리나라를 찾아와 겨울을 난다. 서호 주변은 물이 풍부하고 추수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낙곡들이 많아 그들에게는 최고의 뷔페식당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서호의 인공섬과 습지는 천적을 피해 쉴 수 있는 안락한 호텔 역할까지 해준다. 먹고 자고 쉬기에 이만한 핫플레이스가 없으니 그들이 매년 이곳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달리기를 멈추고 그들을 바라본 짧은 시간은 내게 단순한 휴식 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1km 알림음이 울리지 않는 그 정적 속에서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잠시 멈춰 서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은 기록보다 기억을 남기는 달리기가 더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
주말 아침의 나른함을 깨우는 것은 10km 러닝뿐만이 아닐 것이다. 다음 주말에는 내 손에 워치 대신 아이들의 손을 잡고, 러닝화 대신 쌍안경을 챙겨 나와야겠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달리는 길이 단순히 땀을 흘리는 트랙이 아니라, 귀한 생명들이 쉬어가는 소중한 공간임을 알려주고 싶다. 물론 아이들이 쌍안경으로 새보다 지나가는 강아지를 더 오래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긴 마라톤에서도 가끔은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앞만 보고 달리면 놓치고 지나갈 수많은 '큰기러기'들이 우리 주변에는 항상 존재하니까. 이번 주말, 당신의 산책길에도 뜻밖의 귀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잠시 이어폰을 빼고 그들의 날갯짓 잣에 눈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