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마가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울 때

우리도 진정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by 고래 아저씨

전력 질주만 배운 경주말의 운명

경주마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훈련받는다고 한다. 앞서가는 법, 그리고 전력 질주. 뒤처지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하는 세계에서, 이들은 숨 가쁘게 달리는 법만을 몸에 새긴다. 말은 보통 25년에서 30년을 살아간다. 그런데 경주마로서의 전성기는 고작 3년에서 5년 남짓이다.

그렇다면 남은 20여 년의 시간은 어떻게 채워질까. 대부분의 경주마는 승마용 말이나 치료용 말로 '전환'된다. 이 전환이라는 단어가 참 가볍게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 마리의 경주마가 승마용 말로 거듭나기까지는 보통 1년 이상의 재훈련 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도 훈련의 효과가 모든 말에게 나오는 것은 아니란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고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까. 전력 질주하던 말이 천천히 걷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그런데 알고 보면, 이건 단순히 속도를 줄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본능을 억제하는 고통

경주마에게 뒤처지는 것은 본능적 공포다. 트랙에서 뒤에 있다는 것은 곧 실패를 뜻했다. 그런데 이제 승마용 말이 되면, 뒤에서 다른 말이 달려와도 흥분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보폭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걸어야 한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상상이 가는가. 평생을 '앞서 달려야 산다'고 배운 존재가, 이제는 '뒤처져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본능과 싸우는 일이다. 그것도 매일, 반복적으로.

어쩌면 이건 말보다 사람에게 더 익숙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평생을 '앞서가라'는 메시지 속에서 살아왔으니까.


언어의 체계가 뒤집히는 순간

더 큰 혼란은 소통 방식의 전환에서 온다. 경주마는 고삐를 당기면 '더 빨리 달려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기수가 채찍을 들고 고삐를 세게 당기면, 그건 곧 전속력을 내라는 명령이었다.

그런데 승마에서는 정반대다. 고삐를 당기면 멈추거나 천천히 가야 한다. 같은 신호, 정반대의 의미. 이 '언어의 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과정이 가장 고통스럽고 오래 걸린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비슷하다. 직장에서 '빠르게 처리 감사합니다. 빠른 답변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칭찬이었다. 그런데 은퇴 후 집에서 같은 언어와 행동은 주변과 당사자도 당황한다. "왜 그렇게 조급해?" "좀 천천히 해도 되잖아."라는 핀잔으로 다가올 수 있다. 직장 삶에서 가정 삶은 언어가 바뀐 것이다고 세계가 바뀐 것이다.


직장인과 경주마의 닮은 점

정년퇴직을 앞둔 직장인과 은퇴한 경주마는 묘하게 닮은 듯 하다. 둘 다 평생을 '앞으로, 더 빠르게'라는 단일한 목표 아래 달려왔다. 둘 다 속도가 곧 가치였던 세계에서 살았다. 그리고 둘 다 어느 날 갑자기 멈추라는 신호를 받는다.

경주마에게는 '이제 트랙이 아니라 숲길을 걸어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직장인에게는 '이제 회사가 아니라 집에 머물러라'는 통보가 온다. 전환의 순간이다. 그런데 이 전환이 왜 이렇게 어려운가.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멈추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달리는 법만 배웠다. 심지어 쉬는 시간조차 '다음 질주를 위한 준비'로 여겼다. 우리는 멈추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그래도 다른 점은 있다

하지만 경주마와 우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경주마는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전환된다. 반면 우리는 스스로 그 전환을 준비할 수 있다. 아니, 준비해야만 한다.

경주마는 재훈련 프로그램에 맡겨져서 수동적으로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정년 이전부터 조금씩 속도를 조절하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주말에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가족과 대화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다. 물론 쉽지 않다.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을 바꾸는 건 어떤 생명체에게나 고통스러운 일이니까. 그래도 우리에게는 '의도'라는 무기가 있다. 경주마보다는 조금 나은 조건이다. (물론 그게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속도를 줄이는 것은 퇴보가 아니라 품격이다

경주마가 천천히 걷게 되었다는 것은 야성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에너지를 조절할 줄 아는 통제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건 진화다. 성숙이다.

정년 이후의 삶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의 근육'을 기르는 과정이다. 가족의 표정, 친구의 목소리, 취미의 깊이. 이런 것들은 전속력으로 달릴 때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속도를 줄인다고 해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삶의 밀도가 높아진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던 것들을 제대로 음미하게 된다. 이게 바로 품격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시간

경주마가 승마용 말로 거듭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승자의 미세한 신호를 읽는 능력이다. 체중 이동, 호흡, 발의 위치. 전에는 채찍과 고함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섬세한 교감이 필요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직장인'으로서의 거친 언어를 버리고, '인간'으로서 부드럽게 소통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업무 지시가 아니라 감정 교류. 실적 달성이 아니라 시간 공유. 이건 완전히 다른 언어 체계다.

처음에는 어색하다. 당연하다. 수십 년을 다른 언어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다. 하지만 연습하면 된다. 천천히, 조금씩. 경주마들도 결국 배우지 않았던가.


결승선 너머의 풍경

결승선만 보고 전력 질주하던 경주마에게, 은퇴 후 가장 큰 시련은 천천히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평생을 속도에 몸담아온 우리에게도, 이제는 멈추는 법이 아니라 아름답게 걷는 법이 필요한 시간이다.

걷는다는 건 단순히 느리게 움직이는 게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의미를 담는 것이다. 발밑의 흙을 느끼고, 옆 사람의 걸음 소리를 듣고, 하늘의 색을 구별하는 것이다.

경주마는 결국 배운다. 트랙이 아닌 숲길에서, 박수 소리가 아닌 새소리 속에서, 자기만의 속도를 찾아낸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결승선 너머에는 더 긴 길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러닝을 멈추게 한 서호의 귀한 손님, 큰기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