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관찰하는 비추고 녹화하는 카메라
머리 위 어딘가에 작은 카메라가 떠 있어서 하루 종일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까? 길을 걷더라도 사무실을 들어가더라도 보안을 목적으로 세상을 찍고있는 카메라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만약에 한 개인의 삶을 실시간으로 녹화가 되고, 원하면 누구나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얼마나 달라질까 생각해 본다. 세상의 나쁜 사람은 조금 줄어들까 싶다가도, 곧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누구도 보지 않을 때 주머니에 넣기 싫은 쓰레기를 슬쩍 내려놓는 일은 사라질까 싶다. 금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라이터보다 양심을 먼저 찾게 될까 싶다. 집에서는 배우자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바깥에서는 점잖은 얼굴을 하는 기술이 여전히 통할까 싶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람은 생각보다 많이 얌전해진다.
그 얌전함이 선함인지, 아니면 단지 들키지 않으려는 본능인지는 늘 헷갈린다.
우리는 종종 착한 사람이 되기보다 곤란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사실 둘은 비슷해 보여도 속이 꽤 다르다. 겉으로는 같은 행동인데, 마음속 엔진은 전혀 다른 연료로 돌아가기도 한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본색이 나온다고들 말한다. 그 말은 절반쯤 맞고, 절반쯤은 너무 자신만만하다.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것은 본색이라기보다 감시가 없을 때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습관은 인격보다 더 집요하다. 우리는 생각보다 원대한 신념으로 살지 않는다. 대체로 귀찮음과 편리함과 체면이 번갈아가며 운전대를 잡는다. 그래서 쓰레기 하나를 끝까지 들고 가는 일도 철학보다 손의 귀찮음과 더 자주 싸운다.
인간은 거대한 존재인 척 말하지만, 실제로는 손이 불편하면 정의도 잠깐 미뤄두는 동물이다. 누군가 보고 있으면 행동은 금세 표정을 고친다. 허리를 조금 더 세우고,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고, 손끝을 조금 더 신중하게 쓴다. 그 순간 사람은 더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바뀌는 것은 늘 같은 편이 아니다.
행동에서 더 나아가 마음의 무서운 상상도 해본다. 만약 마음까지 비추고 녹화할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사람은 지금보다 더 선해질까 하는 생각이다. 입 밖으로는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여러 번 던진 말들이 있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문을 세게 닫은 순간들도 있다. 행동을 들키는 것보다 마음을 들키는 것이 더 두려운 이유가 있다. 행동은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마음은 대개 너무 정확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직 실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자주 무죄 처리한다. 하지만 인간의 하루는 실행된 행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카메라가 있다면 세상은 조금 더 조용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용함이 평화인지 위축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사람은 보일 때보다 숨길 때 더 많은 에너지를 쓴다. 결국 완전한 감시는 선함을 키우기보다 연기를 정교하게 만드는 쪽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사람은 들키지 않기 위해서도 꽤 훌륭해질 수 있다. 이 말은 웃기지만, 조금 슬프기도 하다. 우리는 이상하게도 양심보다 CCTV에 더 빠르게 반응할 때가 있다. 경고문보다 렌즈가 더 설득력 있는 날도 있다.
이혼을 앞둔 사람들이 나와 서로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한 행동을 카메라로 다시 보고 눈물을 흘린다. 자기 목소리를 제삼자의 귀로 듣고, 자기 표정을 낯선 사람의 얼굴처럼 바라본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카메라가 때로는 거울보다 정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자기 행동을 기억으로 볼 때와 영상으로 볼 때가 다르다. 기억은 늘 자기 편집실을 거친다.
억울한 표정은 확대하고, 민망한 장면은 과감하게 삭제한다. 기억 속의 나는 대개 실제의 나보다 사정이 많고 사연이 깊다. 반면 영상은 제법 무심하다.
네가 그렇게 말했고, 저 사람이 저렇게 굳었고, 그 침묵이 그만큼 길었다고 담담하게 보여준다. 거기에는 변명의 내레이션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화면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무게를 본다.
그런데 묘한 장면도 이어진다. 그토록 울고, 반성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카메라 앞에서 무너졌던 사람이 카메라가 사라지면 다시 예전의 자세로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면 인간은 깨닫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너무 빨리 원래대로 접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춘기를 지나고 스무 살을 넘기면 행동과 사고의 틀이 아주 천천히 굳어진다고 느낀다. 물론 바뀔 수는 있다. 다만 결심은 빠르고, 변화는 느리다.
우리는 흔히 변화를 의지의 문제라고 말한다. 조금 더 세게 마음먹으면 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사람을 붙들고 있는 것은 의지보다 패턴인 경우가 많다. 매일 반복한 방식은 어느새 성격처럼 굳는다.
그래서 작심삼일은 의지가 약해서만 생기는 말이 아니다. 삼일은 대개 결심이 살아 있는 시간이고, 사일째부터는 습관이 반격하는 시간이다. 인간은 결심할 때는 혁명가 같고, 실행할 때는 생활인 같다.
그리고 생활인은 혁명가보다 저녁 식사 시간에 훨씬 민감하다. 나 역시 나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집은 비판하기 쉽지만, 내 고집은 사정이 있다며 품게 된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유독 관대한 이유는 평생 같은 집에 살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더 흥미로운 것은 사람은 감시에도 익숙해진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허리를 세우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렌즈를 가구처럼 여긴다. 늘 거기 있으니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인간은 적응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회사에 가면 천장 구석의 CCTV가 눈에 잘 들어온다. 어느 가게에 들어가도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게 된다. 물론 대단한 범죄를 계획해서가 아니라, 괜히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양심이 아니라 시선의 구조를 먼저 살피는 이 습관은 어쩐지 현대적이다.
그런데 며칠만 지나면 풍경이 바뀐다. 카메라는 여전히 있지만 긴장은 사라진다.
사람은 반복되는 자극을 배경으로 밀어 넣는 데 탁월하다. 그래서 감시는 초기에만 효과가 크고, 오래되면 생활의 벽지처럼 옅어진다. 익숙함은 참 이상한 힘이다.
좋은 것에도 익숙해지고, 나쁜 것에도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충격이던 일도 나중에는 뉴스 자막처럼 스쳐 지나간다. 놀라움조차 자주 보면 근무 태만에 빠진다.
어릴 적에는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세상이 참 넓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참 재미있었다. 별별 사연과 별별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가 조금 길어졌다. 그때는 텔레비전이 창문 같았다. 방 안에 앉아 세상의 낯선 바람을 조금씩 들여보내 주었다. 지금은 볼거리가 넘친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기이한 사건도, 충격적인 장면도, 기막힌 사연도 끝없이 나온다. 너무 자주 보다 보니 놀라움도 금세 닳는다.
세상은 더 자극적으로 변했다기보다, 우리의 놀람 근육이 과로로 둔해진 것에 가깝다. 예전에는 하나의 장면 앞에서 멈춰 생각했다. 지금은 열 개의 장면을 넘기며 잠깐씩 반응한다. 생각은 깊어지기보다 빨라졌고, 감정은 오래 머물기보다 자주 갈아끼워진다. 놀라움이 많아진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덜 놀라는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요즘 우리는 남의 이상한 행동을 쉽게 본다. 그리고 너무 자주 본 나머지, 이상함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카메라가 세상을 더 많이 보여준 것은 맞다. 하지만 더 많이 본다고 해서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머리 위 카메라가 내 하루를 실시간으로 지켜본다면 사람들의 행동은 달라질까 하는 질문이다. 내 대답은 아마 이렇다. 조금은 달라지고,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며, 그래도 완전히 헛되지는 않다. 감시는 우리를 잠시 바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잠시가 모이면 사고를 줄이고 상처를 덜 만들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카메라는 분명 쓸모가 있다. 다만 카메라가 영혼까지 교정해 주리라 믿는 순간에는 조심해야 한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들킴의 공포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속이기 싫다는 마음이 함께 와야 한다. 결국 변화는 남의 눈으로 시작될 수는 있어도, 자기 눈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 순서를 건너뛰면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만 반듯한 사람이 되기 쉽다. 어쩌면 정말 필요한 것은 머리 위의 카메라보다 마음속의 편집 중지 버튼인지도 모른다. 자기 기억을 유리하게 자르지 않고, 자기 행동을 자기 편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정직함 말이다. 그 정직함은 늘 불편하다.
하지만 사람을 조금씩 바꾸는 것은 대개 편안함이 아니라 그런 불편함이다.
인간은 완벽해서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민망해서라도 한 번 더 고쳐보는 쪽에 더 가깝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있느냐 없느냐만은 아니다. 그 시선을 빌려 언젠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느냐가 더 중요하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내가 조금씩 나아진다면, 그때는 카메라가 꺼져 있어도 괜찮다. 그리고 아마 우리가 바라는 변화는 처음부터 그런 종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