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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환 Jul 19. 2021

차라리 '팔걸이'였다면


빈 의자

                    최원정     

조금 힘들면

쉬었다 갈 수 있는

빈 의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무 말 없이

당신의 휴식을 도와줄

그런,

편안함이었으면 싶습니다


   

  벤치를 보며 이곳에서 잠시 쉬어갈 누군가를 떠올렸습니다. 딱딱하든 푹신하든 상관없습니다. 잠시 앉아있는 것만으로 다시 걸어갈 힘이 생길 겁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주변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벤치를 가로지르는 장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랜 시간 ‘팔걸이’인 줄만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장치, 노숙인들이 의자에 눕는 걸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10여 년 전, 서울역과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설치되기 시작해 지금은 어디서든 흔히 보일 정도로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냥 팔걸이였다면 좋았을걸’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착잡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습니다.

    

▲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이호 교수가 한 말입니다. 이 교수는 수많은 시신을 부검하면서 누구나 사건·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불행한 일은 늘 예고없이 찾아오고 그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노숙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노숙인 모두가 게으르고,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들은 아닐 겁니다. 저마다 지금에 이르게 된 사정이 있겠죠.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경우 그럴 가능성이 더 큽니다.     


노숙인들은 매일 따가운 눈총 속에 삽니다. 저 또한 인상을 찌푸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고통받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벤치에 팔걸이를 설치하는 건 이미 삶의 절벽 끝에 선 노숙인들을 밀어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벤치는 이들에게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냉기를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호막이었을 텐데…. 이 보호막조차 뺏어야 했을까요.     


코로나19로 인해 집단감염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는 건 물론,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어지면서 노숙인들의 생계는 더욱 위태로워졌습니다. 금품갈취, 폭행 등 각종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주소가 없다 보니 사회보장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병에 걸리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건강은 나빠집니다. 악순환이 반복되다보니 다시 일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 ‘팔걸이 제거 운동’이 보여준 ‘희망’     

지난 2018년 영국의 남부도시인 본머스에서는 벤치 팔걸이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팔걸이를 없애자는 온라인 청원이 벌어졌고, 유명인들까지 동참하면서 시의회가 결국 철거를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은 벤치에 담요, 이불, 쿠션 등을 가져다 두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습니다. 팔걸이 제거 운동에 참여한 래퍼 프로페서 그린은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작은 연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시민들의 ‘팔걸이 제거 운동’은 그 자체로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이를 지켜본 노숙인들은 그래도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열심히 살아보자고 결심했던 이도 있었을 겁니다.       


수도권의 집값 폭등으로 아늑한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기가 힘든 게 현실입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내 집 마련조차 힘든 현실은 허탈감까지 느끼게 합니다. 마음 편히 쉴 공간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노숙인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패자부활전조차 없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벤치 팔걸이를 없애는 게 더 야박하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알고 보면 슬퍼지는 이야기보다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앞서 소개했던 시의 나머지 부분을 덧붙입니다.


     

내 마음이

여유로운 공간으로 남아     

그대

잠시라도 머물러

새로운 희망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이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한

빈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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