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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Nov 28. 2023

늙은 사르트르의 슬픔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 말하고 있는 인간, 그리고 사르트르

 1929년 24세의 프랑스 청년 사르트르는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21세의 아름다운 여성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 여성은 미모와 교양, 학식을 모두 겸비한 재원으로서 이미 주변에 소문이 자자했다. 프랑스 남성치고 매우 단신에 속하는 160cm 대의 키와 사시(Strabismus)라는 눈의 장애는 사르트르가 도도한 그녀에게 다가가기에 걸림돌이 되기 충분했다. 하지만 명문 그랑제콜에 다녔던 사르트르는 지성과 유머를 무기로 하여 그녀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제2의 성』이라는 책으로 남성중심사회를 비판했던 페미니즘 작가이자 철학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이다. 이번에는 이 보부아르와 계약결혼을 하였으며, 실존주의 문학을 창시한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의 자전수필 『말』을 살펴 보려고 한다.


이지적 여성인 보부아르. 눈빛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달리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한 줄이라도 쓰지 않는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나의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사실 작가이자 철학가였던 사르트르에게 글을 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글로써 그는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또 완성하였다. 차가우리만큼 철저한 지성을 바탕으로 심연의 깊은 곳에서부터 인간성을 분석하여 확립된 정리를 하는 것에는 세상 누구도 사르트르를 따라갈 수 없었다. 누가 임차인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생의 여자친구 보부아르와는 전세계약과 같이 주기적으로 결혼계약을 갱신하여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할 수 있었다. 



계약직 부인이자 여친 보부아르와 쿠바의  <체 게바라>를 만나는 사르트르



자전수필 『말』은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거의 안겨준 작품이다. 사르트르가 59세가 되던 해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는 그의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서술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유년시절 외에 청년시절이나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괴테의 『시와 진실』이 그의 청년기까지의 일화와 사색, 그리고 성찰만으로 이루어진 것과 다르면서도 유사한 부분이다.         


       

 사람이란 신경병을 떨어버릴 수 있지만자기 자신이라는 고질병에서 치유될 수는 없는 법이다아무리 닳고 지워지고 모욕당하고 따돌림당하고 묵살당한다 하더라도어린 시절의 여러 특징은 50대 인간에게 그대로 남아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사르트르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 밑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38년 『구토』라는 소설을 출간하여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식인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자신에 대한 영예와 찬사도 사전검열을 통하여 선별적 인수를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64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사건이 있다. 그는 노벨상이 소위 서방 선진국의 전유물처럼 된 것에 대해 저항하였으며, 이는 앞서 1958년 『닥터 지바고』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당시 파스테르나크는 정치적인 이유로 소련 당국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을 거부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사르트르는 사건 위주가 아닌 생각 위주의 서술로 구성된 『말』에서 자신의 명성이 짜증난다고 하였으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죽는 기회를 놓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유년시절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나아가 글로써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목표도 있었다. 결국 자신도 유한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자각하지만, 지성으로 충만한 펜으로써 인간에 대해 정립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알베르 까뮈와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의 독백과 비교하여 본다면, 까뮈와 그르니에가 자신만의 사유 안에서의 사유, 그리고 그 사유 안에서의 또 한번의 사유라는 방식으로 점점 의식의 심해로 침잠하는 것과는 달리 사르트르는 결코 깊은 바닷속까지 내려가지 않으며 일반적이고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자신으로 접근한다.

 까뮈와 스승 그르니에가 고유한 개인으로서의 자기중심적인 사색을 한다면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을 스스로 무시하거나 부정해버리는 것으로 자기중심성을 역설적으로 나타낸다. 이와 같이 어차피 결이 다른 까뮈와 사르트르였기 때문에 이들의 유명하게 공개된 결별은 예고된 것이라 다름이 없었다.  


    

폭력적 공산주의에 격렬히 저항했던 자유주의자 까뮈 vs 폭력적 공산주의를 선동했던 공산주의자 사르트르



 무신론의 관점에서 인간성과 인생의 철학을 완성한 것 같이 보이는 사르트르의 마지막 모습은 안타깝게 유명할 정도이다. 노년에 '폐수종'이라는 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실존을 애써 부정하며 발악을 하는 것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다. 평소 인간의 선한 의지와 자긍심을 주창하였던 프랑스의 존경받는 대철학자가 이렇게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였기에 사람들은 크게 의아해하며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프랑스 언론은 그의 죽음에 대해 작성한 기고문에서 사르트르가 그토록 마지막 순간에 소리를 지르고 발악하며 횡포를 부린 것은 '돌아갈 본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르트르는 우리 인간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하며,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말하였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확신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탁월한 지성은 우리를 더욱 어리석게 만들는지 모른다. 많이 배우고 학식이 많을수록 표정은 굳어지고 일그러지며, 조물주도 아니면서 인간의 설계도면을 펼쳐놓고 자신있게 중얼거리려 한다.

 어쨌거나 늙은 사르트르는 자신의 도면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슬프게 울부짖고 말았다.


                

환생이니, 그냥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라는 말 등은  '희망사항'일 뿐... 현실에서의 내집 마련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결국 삶을 마치고 난 이후가 진짜이며 정말로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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