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의 『종을 내쫓는 글』이 말하고 있는 호의의 목적
필자는 매년 있는 집안행사에서 멀리 사는 친척을 만나곤 했다. 오랜만에 다같이 모여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 친척은 돌아가는 기차표 예매로 인해 저녁 7시 경에는 아쉬움을 털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고, 잘 잡히지 않는 택시로 고생할 그를 상상하며 마음이 약해진 나는, 굳이 서둘러 일어날 필요가 없음에도 그 친척을 위해 함께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차로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친척은 처음에는 나의 친절에 감격을 하며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플랫폼으로 사라졌지만, 수년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다 보니 웃지못할 또 하나의 일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해에는 내가 늦게 집안행사에 참여하여 홀로 때늦은 저녁을 먹어야 했는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참여한 그 친척은 내가 늦게 온 것에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늦게 오면, 저녁상을 차리는 분께만 미안할 뿐 그 친척에게는 원망들을 일이 없었는데 저녁을 먹는 내내 뾰로통해서는 나중에는 나 때문에 기차를 놓치면 어떡하냐며 불평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으레 이번에도 내가 기차역까지 데려다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고, 나는 ‘아뿔싸’ 하며 그동안의 친절이 그에게는 권리로 변모하고야 말았음을 깨달았다.
정약용은 그의 산문 중 잡문에서 자신의 종에게 위와 같이 매우 너그럽게 대하고 편하게 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산은 왕포(王褒)(남북조 시대 북주(北周) 낭야(琅邪) 임기(臨沂) 사람. 궁정시인으로 섬세한 시를 많이 지었으며, 나라가 망한 뒤에는 망국의 슬픔을 시에 담았다.)가 종을 엄하고 참혹하게 대하는 것이 군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그리하였던 것인데, 다산이 계문(戒文) 읽기를 마치자, 종놈은 좋아라고 날뛰었다. 그러면서 다산에게,
라고 맹세하였다. 하지만 이후로 종은 여유가 생길수록 더욱 게을러져서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 식사만 끝나면 뛰쳐 나갔다가, 해질녘에야 기어들어 왔다. 시장 이곳 저곳을 쏘다니며 잔뜩 취했다가, 술이 깨면 나무 아래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우둔하고 교만 방자할 뿐만 아니라 거칠고 방탕하여 소위 가관이었다. 다산은 평소의 스타일대로 점잖게 타이르며 깨우쳐 주고자 하였지만 어리석은 종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일 뿐이었다. 하다못해 결국 관주인(館主人) 윤자(尹子)가 종놈을 꿇어앉히고는,
종은 이 말을 듣고 콧물과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이었다.
정약용의 이 글은 우리 민족성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고, 나의 호의를 역이용하는 우매한 상대방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는데, 정치와 사회의 변혁과 민족의 계몽을 추구했던 다산으로 보아 민족성에 대한 풍자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중국의 문호 루쉰(1881~1936)도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문학으로써 민족을 계몽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여긴 것처럼, 다산도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와 반학정·추수정·여유당·어사재·수오재·조룡대와 같은 집 이름 이야기, 토지의 소유에 대한 여러 편의 글, 이 글과 같은 잡문 등을 통하여 사소한 생활습관에서부터 국가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변혁을 주문하였다. 지금에 비유하자면 어느 정당의 혁신위원장과 같은 역할일 것이다. 다만 루쉰은 중국인들의 사상과 가치관 등 주로 정신적인 몽매함을 경계한 반면, 다산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실학자이자 경제학자답게 소득을 고르게 재분배하고, 세금을 알맞게 걷고, 기술을 배워야 하는 당위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고사(故事)의 인용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루쉰은 시, 소설, 수필, 평론 등 문학적 장치를 풍부하고 자유자재로 활용하였다면 다산은 설(說)이라는 장르를 통한 것 외에는 대체로 문학적 요소보다 논리적·과학적인 색채가 강하였다.
정약용의 ‘종을 내쫓는 글’을 ‘조선놈은 매가 약이다’라고 하였던 일본제국주의의 통치와 연관짓는 것은 지나친 유추일 수 있다. 하지만 한 정당이 아닌, 우리 민족의 혁신위원장으로서 다산이 임명된다면 어떠한 주문을 내놓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적어도 다산은 위의 종에 대한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에게는 온돌방 찜질이 아닌 이가 부딪치는 냉수마찰을 일차적으로 제시할 것이라는 확신이, 깊어가는 늦가을의 한기와 함께 온몸 곳곳에 스며들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