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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Sep 27. 2023

문과 만세

이덕무의 『간서치전』을 통해 알게 된 나의 모습


아이러니하게도 선행학습을 하는 초등학생에게 자기학년의 수학문제를 물어보면 모르는 경우가 많다. 미적분은 아는데(?), 구구단을 틀리는 등...



  건국 이래 의대열풍이 지금과 같았던 적은 없었다. 대치동이 아니더라도 초등의대반이라고 하여 초등학교 1~2학년이 중학교 수학을, 고학년은 고3 수학을 건드리는 것이 웬만한 도시에는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전문학원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절대로 엄두를 내지 못할 사교육의 뜨거운 바람이 아직도, 아니 이전보다 더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의대열풍의 원인은 무엇보다 예전과는 달리 명문대 진학이 돈과 명예를 보장해주지 못함일 텐데, 일류대 합격이 곧 성공 공식이었던 과거로부터 탈피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그렇다고 작금의 현상이 결코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대쏠림현상은 가뜩이나 반세기 이상을 차가운 눈칫밥으로 연명하던 문과(文科)에게앞으로는 찬밥도 먹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절망으로 다가온다. 정녕 문과의 길(삶)이란, 귀족문과와(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에 나오는 ‘시마무라’와 같이 부모의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무늬만 지식인인 문인을 뜻한다.)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어차피 예전부터 운명처럼 놓여있던 좁디 좁은 비포장 시골길인 것인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간서치전(看書痴傳); 책만 읽는 멍청이』을 통해 꾸밈이 없다못해 결점만 부각된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데, 비하에 가까운 자기성찰은 결국 문과에 대한 슬픈 예측이 되고 말았다.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우리말로 하면,  '책만 보는 바보 이야기' 이다.  우측은 이덕무의 초상화.

           



 가난해서 반 꿰미의 돈도 저축하지 못하는 주제이 세상의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도우려 하고어리석고 둔해 한 권의 책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오랜 세월 담긴 경전과 역사책그리고 이야기책을 다 보려고 하니 

!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 이덕무야!     

     




 필자는 위의 ‘바보 이덕무야!’에서 이덕무 대신에 본인의 이름을 넣고 싶은 충동을 숨기지 못한다. 문과는 사실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의 양반 중 문인이나 선비, 유생 정도가 그나마 자존심을 유지시켜 주었지만, 이들의 학문적 모체가 되었던 성리학의 폐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문과를 대표하는 기득권 양반상에 대한 고발은 박지원의 단편소설집 『열하일기』 가운데  <양반전>, <허생전>, <호질>에 다채롭게 잘 나타나 있다.  굳이 양반의 폐단에 대한 인과관계를 따져보자면, 1592년의 임진왜란과 1637년의 병자호란 모두 성리학을 등에 업은 문과의 실패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는 평생 고치기 어려운 버릇이 있다세상 물정에 어둡고 처세에 졸렬한 나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하루 종일 문장과 민속그리고 가요에 이르기까지 되풀이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은 내가 말을 잘 하는 사람으로 안다그러나 나와 취미가 맞지 않으면 그가 말하는 것을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것을 그도 알지 못하게 된다.       



   

 당연하지만 문과에 폐단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이덕무가 말하는 것을 즐긴다고 하였듯이 선비들은 토론을 주요한 의사결정 방식이나 소양(素養)으로 삼았다. 마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 절차에서 검찰과 피의자가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 같이, 조선시대 선비들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임금 앞에서 생각하는 바를 피력하였고, 상대방의 잘못을 논파하였다. 이러한 선비들의 토론문화가 제도화된 것이 바로 ‘경연(經筵)’이다.      


이 경연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왕은 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학식으로 무장한 신하들에게 무시를 받지 않기 위해 스트레스 좀 받았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경연에 진심이었다.


 

 문과는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말과 글로써 현출한다. 그 외의 과(科)들은 현물과 현상으로 자연법칙을 증명하고, 새로운 도구와 장치를 고안하며, 몸짓과 소리로써 감정을 나타낸다. 이들은 우리몸의 각 지체와 같아 서로간에 우열이 없어야 하는 것인데, 고려·조선시대에는 문과 위주의, 현대에는 이공계 위주의 세상이 된 것이니, 정치판의 정권교체 판국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정치판보다 고질적이며 근본적일 수 있다. 모두의 다양한 장점들을 수용하지 아니하고 기득권을 가진 세력의 가치를 ‘시대정신’이라고까지 미화하며 반대파를 숙청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것이다.

 이덕무는 지난번에 살펴본 실학자 박제가의 동료로서, 평생 책을 옆에 끼고 산 고지식한 선비 중의 선비였다. 양반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실학자였음에도, 이덕무 자신이 무능력한 양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기에 『간서치전』을 통해 자신을 한탄하면서도 옹호하며, 변명하면서도 굴절없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한번은 비 오는 날 누워 평생 동안 남에게 빌린 물건을 생각해 보았는데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내 성품이 옹졸하여 남이 조금이라도 어려워하는 기미가 보이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상대방이 나에게 빌려주기를 조금이라도 꺼리지 않는다고 확신이 들면 그때서야 말을 건넨다

그래서 남에게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경우는 손을 꼽을 정도다    



      

 이번에도 필자는 위의 글을 읽고는 ‘딱 나네!’ 라며 마음속으로 외치고 말았다. 책은 간접경험을 가능케 하지만, 직접경험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인생을 간접경험으로만 채운 사람은 머릿속으로는 세계일주도 거뜬하겠지만, 몸은 내 집 문밖을 나서기도 주저된다. 이 괴리가 크면 클수록 자동차 엔진에 기름 슬러지(sludge)가 생기듯, 곳곳에서 사고(思考)와 사유(思惟)의 불순물이 쌓여만 가게 된다. 그 중 문과의 주특기인 탁상공론은 자랑스런 토론문화의 불가피한 노폐물에 해당한다. 현장에서 토론을 하기는 어렵기에 어쩔 수 없이 현장의 상황을 가정하며 논의를 하다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결론이 나오기 일쑤이다.      


 과거 문과 위주의 정책 및 문화가 결국 조선의 패망을 초래했다면, 현재의 문과 홀대의 정책과 가치관은 미래 세대의 정신적 탈선을 예고할 수 있다. 아니, 이미 탈선을 하는 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신과 사상은 시대를 이끌어가야 하고, 시대를 이끌기 위해서는 기술과 물질이 동원되어야 한다. 가훈과 가풍이 집안을 대변하는 것이지 차량, 가재도구와 음식이 그 집안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펴본 이덕무의 『간서치전』은 문과의 과거와 오류를 뼈저리게 반성하면서도 끝내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해당한다. 문과는 결코 우월하지 않다. 하지만 절대 온돌방의 윗목에만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실학자인 이덕무마저 작금의 지나친 실용주의에는 “그만하면 됐다.”라며 우려를 표할지 모른다.


                                             

(서양식) 실용주의는 황금만능주의에서 기인한다. 돈이 되지 않는 것은 비실용적으로 간주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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