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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Jul 18. 2024

팀 킬

내부의 적을 조심하라!

 어느 덧 15년이 다 되어가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며, 아직도 그 울림은 언제 그칠지 모르는 진동으로 내 마음속을 간지럽히기도, 아프게도 하고 있다. 당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진학한 대학원의 석사과정 중 어느 교수님의 연구조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의 연구실로 매일 출퇴근을 하면서 학부와 대학원 수업의 출결확인을 하고 심부름도 하면서 여느 조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는데, 다만 색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내가 모시는 교수님께서는(지도교수님은 아니었다) 점심식사를 보통 혼자 하시는 적이 많았고(정확히는 내가 조교로 오기 전까지), 거의 매일 학교 근처의 ‘마포갈비’라는 고깃집에서 약 2시간 동안의 프랑스식 식사를 하셨다. 


위와 같은 분위기의 프랑스식사는 아니고, 단지 프랑스인들처럼 식사시간이 길었다는 뜻이다.


 나는 ‘당연히 조교라면 교수님과 점심을 같이 해야지’라는 일념으로 교수님의 점심 제안에 언제나 응하였고, 최소 일주일에 3번은 점심식사를 ‘마포갈비’에서 했던 것 같다. 일주일에 두 세번씩 점심마다 고기를 얻어먹는 나를 친구들은 부러워하였지만, 내 입으로 들어가는 고기는 고기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참과 함께 긴장한 상태로 보초를 서는 군인에게, 보초를 설 때마다 피자를 준다고 해서 그 피자맛이 제대로 느껴지겠는가. 


군대 초소에서 선임과 함께 2인 근무에 들어가면, 호텔 뷔페가 차려져 있더라도 체할 뿐이다.


 아무리 고기를 천천히 구워먹는다 하더라도 2시간의 점심시간은 매우 길었는데, 물론 그 이유는 ‘술’ 때문이었다. 교수님께서는 술을 사랑하셔서 당시 내가 보기에는 매일 술을 드셨고, 아마 매끼 드신 것 같다. 나는 교수님과 점심식사 외의 다른 식사는 하지 않았지만(아주 가끔 회식으로 저녁식사를 제외하고), 아침이나 저녁에도 술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종교상·체질상·기분상 술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하는 수준은 아니었고, 못하는 것과 즐기지 않는 것의 중간단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은데, 조교를 시작하기 전 동기와 선후배들로부터 교수님의 술사랑에 대해 익히 들어오던 터라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고(그 각오란 어떠한 경우에도, 다시말해 회유나 강요, 심지어 협박이 있을지라도 절대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 역으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의 비장한 마음으로 마포갈비의 문을 열곤 했다. 역시 교수님께서는 초반에 한 두번 술을 전혀 못하냐고 아쉬운 듯이 말씀하시고는 결코 나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역시 연륜과 내공이 있으셔서 ‘난 죽으면 죽었지, 술에 유혹되지 않을 겁니다’라는 무언의 내 눈빛을 간파하신 듯 했다.


 이렇게 한 학기가 흘렀을까. 친구들은 술고래 교수님의 조교로 들어간 내가 전혀 흐트러진 모습 없이 훌륭하게(?) 조교생활을 잘 해나가는 것을 보고 놀라기까지 했다. 나 역시 ‘나의 종교적 신념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마냥’ 뿌듯해하였고, 웬만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사실 나에게 ‘술’이라는 것은 전혀 유혹이 될 수 없었다. 유혹은, 그것에 이끌리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나는 아예 ‘술’을 싫어하였기에 술을 먹지 않는 것이 지조나 신념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가끔 주변 사람들이 술, 담배를 전혀 하지않는 나에게 ‘넌 무슨 재미로 사니’라는 눈짓을 하지만 그때마다 ‘난 공산당도 싫고, 술, 담배도 싫어요’라는 무언의 답을 한다. 어쨌든 이렇게 나의 ‘슬기로운 조교생활’은 순풍에 돛단 듯 망망대해를 기분좋게 미끄러지고 있었고, 어느 날 점심시간에 생긴 예기치 않은 사건을 난 꿈에서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 날 점심도 마찬가지로 ‘마포갈비’를 향해 교수님과 둘이 걸어가고 있었고, 교수님께서는 식사 자리에 좋은 분이 한 분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동료 교수님이신가’라는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가끔 동료 교수님과 점심을 하실 때가 있었고, 나의 지조와 절개는 어떤 교수님이 합석을 하든 낙락장송(落落長松)으로 혼자 고고했다. 술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정신적 무장을 하고 있는 당시 나의 마음에서는, 내가 선(善)이고, 옆에서 호심탐탐 술을 권하고자 하시는 교수님들 세계가 악(惡)으로까지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마포갈비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그 ‘좋은 분’은 동료 교수님이 아니셨다. 우리 교수님께서 즐겨 찾으시는 학교 테니스장을 관리하시는 아저씨라고 하셨다. 즉, 교직원이신 것인데, 법대에서 계속 마주쳐야 하는 동료 교수님이 아니기에 나는 살짝 마음이 놓이기도 하였다. 


당시 난 육식동물이었다. 요새는 밖에서 고기 먹을 일이 많지 않다. 건강에는 좋지 뭐... 


 어쨌거나 오늘 점심의 초대손님은 학교 테니스장을 관리하시는 인상좋은 60대 어르신이었다. 불판에 고기를 다 올리기도 전에 역시나 예상했던 일차 공격이 들어왔다. “조교님, 한 잔 괜찮지요?” 하며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막걸리를 사발에 따라주신다. 이 정도의 공격은 그동안 눈 감고도 막아왔던 이재명 조교다



      “저는 술을 하지 않습니다.”       


      “아, 그래요? 한 잔 정도는 괜찮을텐데...” 



 

 테니스 어르신은(지금부터 테니스 어르신이라 하겠다) 역시 아쉬운 눈치를 보였다. ‘이번 전투도 이렇게 초반에 마무리 되는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교라면, 술 한 병 정도는 해야지!”라며 우기는 동료 교수님도 상대했던 내가, 인자한 테니스 어르신 정도는 한 두 마디 정중한 태도로 정리해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나는 진정한 고수의 전략에 보기좋게 걸려들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주조(酒造)하고야 마는데...     


 테니스 어르신은 식사 전에 기도를 하셨는데 어느 교회 장로님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들이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라 앞으로 목회자가 될 거라고 하셨다. 나도 교회를 다닌다고, 청년부에 있다고 말씀드리니 어르신은 매우 반가워하셨고 이렇게 우리들의 심리적 거리는 삽시간에 매우 가까워질 수 있었다. 나도 언제나 성을 지키는 수성(守城)의 위치에 있다가, 연륜있고 든든한 동맹군이 옆에 있으니 모처럼 아군(?) 앞에서 정신적인 무장을 하나하나 해제하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고기맛이 느껴지는 점심시간이 되겠구나’ 하면서...) 


 점심시간만 되면 영국 왕실의 근위병처럼 경직되어 버렸던 내 얼굴에 미소가 생기고, 교수님과 테니스 어르신에게 이런 저런 말씀도 건네면서 어느 때보다 편한 점심시간이 되려나 했는데, 그 때부터 어르신의 총구는 다시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당시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신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들도 나랑 술을 마신다.’,


 ‘나도 교회 장로인데 술을 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포도주를 직접 만드시지 않았느냐’,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다같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느냐’,


 ‘술은 우리 민족이 너무 술을 좋아하니까 미국 선교사가 임의적으로 금지했던 것이다’


 등등 옆에 계신 우리 교수님은 기독교가 아니시기에 특별한 말씀은 없으신 채 고개만 끄덕이셨고, 어르신은 막걸이 몇 사발을 연속으로 들이키시더니 계속 말씀을 이어 나가셨다. 모태신앙으로 나름 활발한 신앙생활을 하여 웬만한 것은 다 판단할 수 있는 내가 보기에도 어르신의 말씀에는 전혀 틀린 내용이 없었다. 



 "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 믿음이 중요한 거야!" 



점점 언성이 높아지는 어르신의 막걸리 사발을 나는 얼떨결에 결국 받고야 말았고, 내가 더 이상 잔을 받으려 하지 않자, 



"한 잔, 두 잔이 중요한 것이 아니야! 

 내 마음만 그 분께 있으면 돼!"  


 "......"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았기에 나는 이성적으로도 어르신께 점점 잠식당하고 있었다. 

가끔씩 ‘내 아들이 이제 목사님이야!’ 라는 후렴구는 끝내 나를 완전히 장악하기에 충분하였다. 


 결국 나는 막걸이 두 사발이 아니라 몇 사발을 마셨고, 맥주도 곁들인 것 같다. 초면에는 나에게 ‘조교님’이라 존대하셨던 테니스 어르신이 나중에는 나를 ‘바리새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정죄하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된 신앙인을 비판하며 나를 혼내는 상황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는 테니스 어르신을 이 날 처음 뵈었고, 기껏 두 시간 함께 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거의 수 년만에 적지 않은 낮술을 마신 나는 교수님과 학교로 복귀하지 못하고, 곧바로 혼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얼굴이 새빨개져서 누가 보더라도 ‘나 낮술 좀 했소이다’라는 표시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 술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나와 친한 사람들 중에서 술을 즐기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술 좀 마시는 사람이 재밌고 유쾌하고 사람 좋긴 하다.


 이 후 테니스 어르신은 가끔씩 점심식사를 같이 하시곤 했다. 첫 만남에서 이미 술을 마셔버린 나는 더 이상 술을 거절할 명분이 사라졌고, 이는 다른 교수님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교수님께서 생각하시기에도 테니스 어르신 앞에서는 술을 마시고, 다른 동료 교수님들 앞에서는 술을 거절하는 나의 태도는 이해상반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의 지조와 신념은 이렇게 같은 편이라 믿었던 그 분에 의해 무너져버린 것이다. 아니, 내가 그 때에도 정신을 차려서 끝까지 마시지 않았더라면 되었겠지만 당시의 나는 장기간의 고군분투(孤軍奮鬪)에 아군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친 마음을 열어보이고 말았다.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뭐가 대단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깨달은 바는 나의, 우리의 적은 보통 외부에 명확히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적은 내 주변에,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직접 제대로 겪어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이 추억은 귀중한 교훈으로 지금도 내 마음속 깊이 남아있다. 


 그 사건 이후 매일의 점심시간이 몇 배나 고역이 되어가기 시작했을 무렵, 다행히 나는 인턴으로 취업이 되어 연구조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테니스 어르신은 내가 조교를 그만두자 많이 섭섭해 하셨다고 한다.      


아직도 테니스장을 보면 그 어르신이 생각난다.  이건 평생 계속될 것 같다. 그렇다고 그 분을 절대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귀한 깨달음을 얻게 해주신 고마운 분이시다.


요즘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팀 킬(Team Kill)' 논란이 한창이다. 실제 전쟁터에서도 적군보다 아군이 무서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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