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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Apr 25. 2021

'사랑의 기술'을 읽고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이와 같이 경험되는 사랑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그것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곳이다.

각자가 자신들에게서 도망치지 않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합일되는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이다. -148p




언젠가 읽어봐야지 마음속 장바구니에 담아 둔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일독했다. 최근 나의 관심사는 '사랑'이다. 늘 언제나 사랑이었지만 자각하며 단어로 표현하는 시기는 작년쯤부터다. 분명 실체도 있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 타령과 다른 사랑의 어떠한 개념이 있다고 막연히 생각해왔던 그 개념을 이미 50년도 더 전에 에리히 프롬님이 정리해두었다는 사실을 알고 뛸 뜻이 반가웠다.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이 정도 지적 능력과 논리적 사고가 결합해야 사랑에 대한 글이 이리도 오래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다는 헛헛한 깨달음이다.


처음 사랑에 대한 정의와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안개 속 내가 하고 싶었던 말과 상당 부분 일치하며 사이다를 마신듯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현대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든 활동에 시장주의적 사고방식을 부여받고 몰개성적인 소비자로서의 삶을 강요당한다.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사는 게 얼마나 어렵고 고단한 일인지, 그 허무하고 피곤한 세상에서 실존의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진정한 사랑을 할 때 오로지 다른 대상과 연결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연결이라는 것은 서로가 같아지기 위해서도 서로 파괴하기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각각의 색깔과 개성과 존재를 한층 강화해주는 강력한 행위라는 것이다.



책은 독서 클럽에 의해 선택되고, 영화는 필름이나 극장 소유자에 의해 선택되고, 광고 슬로건도 그들에게 지불을 받는다. 휴식 역시 일정하다. 곧 일요일의 드라이브, 텔레비전 연속물, 카드놀이, 사교 파티 등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다음 월요일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모든 활동은 일정하고 기성품화되어 있다. 이러한 상투적 생활의 그물에 걸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은 인간이고, 특이한 개인이며, 희망과 절망, 슬픔과 두려움, 사랑에 대한 갈망, 무와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단 한 번 살아갈 기회를 갖게 된 자임을 잊지 않을 것인가? -35p


공서적 합일과는 대조적으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다. 사랑은 인간에게 능동적인 힘이다. 곧 인간을 동료에게서 분리하는 벽을 허물어버리는 힘, 인간을 타인과 결합하는 힘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로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40p


아무 생각 없이 사회에 정해주는 역할에 따라 살다 보면 절대 실존하며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온전히 만끽하며 살아갈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주장한다. 사랑은 대상을 고르는 일이 아니며 우연히 일어나는 운도 아니라고, 관심을 지니고 훈련해야 할 대상이고, 사랑은 활동이며 신앙이며 삶의 목적이라고. 온 생애 걸쳐 부단히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하는 게 사랑인데, 그것만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활동이라고.


살면서 몇 번이고 완전하고 충만한 사랑의 경험이 있고, 그 힘을 느끼며 실존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완전함을 맛보았다는 것, 그게 내 인생에 얼마나 행운인지!




사랑의 기술의 실용이라는 관점에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듯이다.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겸손과 객과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는 이방인에게 객관적일 수 없는 한,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참으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역도 진이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나는 자아도취적으로 왜곡된 어떤 사람과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상과, 나의 흥미, 욕구, 공포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나의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172


반면 읽고 나서 반성이 밀려드는 구간이 있었다. 사랑의 충만함을 게이지로 표현한다면 한 때, 95%까지 완충된 사랑의 에너지 상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에 가득 차서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어도 바닥나지 않던 신기하고 행복했던 그 상태에 비교하자면 요즘의 나는 기껏해야 40~50% 정도의 사랑을 지녔을 뿐이다.


아마도 그때보다 겸손과 나에 대한 객관성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보다 각성하고 있는 시간이 반도 되지 않고 혼자 고요하게 보내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미래와 과거에 대한 미련과 걱정도 더 많이 하고 있고 자신의 안정에 대해 겁이 나서 욕심이 나기도 하다. 감사한 마음은 줄어들었고 전체적으로 에너지가 격감해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줄 여유도 많이 줄어들어 대체로 피곤하다는 생각이 많다.


다시 깨어있는 연습과 혼자서 제대로 보내는 시간을 늘려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이 책을 교리처럼 읽고 또 읽으며 사랑의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의 말대로 사랑은 결의이자 판단이고 약속이니까.


마지막으로, 그토록 귀하게 사랑하는 경험을 하고 시답잖은 내면의 해결되지 못한 이유로 또 실수와 싫증과 두려움으로 인해 헤어진 모든 인연에 감사함과 미안함을 전하며, 어디선가 한 사람으로 온전히 실존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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