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붓에 운명을 두고, 다시 부활
아침만 해도 줄줄 흐르는 콧물이 멈추지 않아 하루 더 쉴 계획이었다. 약국에 가서 코감기를 완화시키는 약을 구매했다. 약국에서 비타민이나 기침을 멈추는 약이 추가로 필요하지 않냐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감기약은 한국보다 두 배쯤 비쌌다. 눈탱이가 아니라 정상가였다. 현지인들이 따로 가는 약국이 있나? 차라리 현지인들에겐 1/10 가격이면 좋겠다. 괜한 걱정을 하고 알록달록한 알약 하나를 삼켰다.
기분 탓인가, 플라세보 효과였을까, 우붓의 콧물약은 강력했다. 더 이상 콧물이 줄줄 흐르지 않았다.
어젯밤에 찾아 둔 작업하기 좋아 보이는 카페에 갔다. 감기 기운이 있어 에어컨이 가동되는 실내를 피해 2층 테라스로 올라갔다. 우와!!!!! 여기다, 여기 미쳤다. 너무 좋다. 뷰가 끝내주고 거리는 조용했다. 음악은 적당했고 자리마다 콘센트가 있었다. 와이파이도 빵빵했다. 아무도 없어 혼자 전세 낸 기분으로 신나서 마구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아지트를 발견했다.
우붓은 전체적으로 커피가 훌륭하다. 거의 라테를 마셨고, 몇 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는데, 이제까지 날 실망시킨 곳은 하나도 없었다. 전체적으로 커피가 훌륭하다. 평소 먹는 취향과는 다르지만 라테로 먹으면 너무 맛있는 원두이다. 게다가 작은 커피숍조차 라테 아트 만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날씨도 오래간만에 너무 좋아서 몽글몽글한 구름이 가득했다. 신카이마코토가 그린 하늘보다 예뻤다. 새들이 지저귀고 있고. 오랜만에 이 습도, 온도, 바람, 음악, 공간, 커피, 완벽하다. 집중해서 글도 꽤 썼다. 아아 들뜨고 행복한 마음.
갑자기 사원에 가고 싶어졌다. 구글맵을 보다 보니 못 보던 폭포 사원이 있었다.(우붓 외곽에 멋진 곳이 많다. 바이크를 탈 수 있었으면 정말 정말 좋았을 텐데. 아쉽다) Taman Beji Griya Watarfall, 우붓을 대표하는 관광지는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이거다 싶다.
리뷰는 호불호가 갈렸다. 인생 잊지 못할 경험이고 너무 좋았다고 입이 마르도록 진심 어린 칭찬을 늘어놓은 리뷰가 있는 반면,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고 상업적이라는 댓글도 있었다. 무엇보다 부엉이와 박쥐를 가둬둔 행위가 야만적이라고 항의하는 리뷰가 심심찮게 보였다. 그들은 멸종 위기종을 보호하는 행위로 정당한 자격증과 절차로 그들을 보호 중이라고 평화를 빈다고 댓글을 달았다.
300,000 IDR(한화 25,000원), 물 정화 의식이 있단 걸 알게 되고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는데 아주 유명한 절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별로라는 리뷰를 봤다.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데 이곳은 그곳보다 훨씬 한적하지 않을까? 바로 갈까 고민하다가 숙소로 가서 노트북과 짐을 두고 수영복을 갈아입고 젖은 후 입을 옷도 챙겼다.
오토바이로 35분 거리, 달리는 내내 풍경이 끝내줬다. 우붓은 시내보다 외곽 쪽 풍경이 숨 막히게 아름답다. 오토바이를 달리다 보면 영원히 이렇게 달리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도착한 폭포는 초입구부터 나를 설레게 했다! 계단논이 여기도 있네. 시야가 탁 트여있다.
너무나 멋진 자연 풍경과 별 개로 입장료를 구매하는 데까지 20분 소요되었고 (내 앞에 세 팀 있었다) 20분 정도 기다리면 된다는 안내와는 다르게 1시간 넘게 대기해야 했다. 설상가상 분명 나보다 뒤에 온 여자분이 내 차례라고 생각했던 때에 먼저 입장하는 걸 보고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다 같이 기다리는 건 괜찮은데 오랜만에 에고가 왜 저 여자 먼저 들어가지? 우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는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더 먼저 왔던 걸지도 모르고 미리 예약을 한 걸지도 모르고, 아니면 다른 코스(물 정화 의식 말고 타로니 손금이니 아로마니 여러 코스가 있다)를 선택한 걸지도 모르지. 기다려. 기다리면 차례가 올 거야.
설상가상으로 오랜 시간 기다린 후 배정된 가이드는 꽤 성의가 없었다. 빨간색 천과 그린 천 두 가지 옵션이 있었는데 그는 묻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빛바랜 빨간색 천을 건넸다. (그린색이 갖고 싶었다!) 그리고 띠 색깔도 대충 아무 거나 골라 주었다. 처음 고조되고 설렜던 기분은 여지없이 곤두박질쳤으나 나는 그와 말다툼하고 싶지 않았다.
원체 손재주가 없는 나는 천을 어떻게 원피스처럼 만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되게 예쁘게 묶은 여자들 틈으로 대충 어떻게든 곰처럼 묶은 나는, 괜찮아. 기다림은 잊자. 가이드도 잊자. 폭포만 보자라고 되새겼다.
그런데 걱정할 필요도 없이 그를 따라 맨발로 길을 나서자마자 기분이 좋아졌다. 아아- 정글 같은 신성한 신전이 있는 이 공간에서는 어떤 불만도 불평도 할 수 없어진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걸 잊었다. 모든 게 좋아졌다 모든 게 감사했다.
그래도 가이드는 깔끔하게 신에 대해서 조각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의식을 하나하나 행하게 안내해 줬다. 중간중간 몰랐는데 사진과 동영상도 멋들어지게 찍어줬다.(나중에 보니 너무 많이 찍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우붓 사람들처럼 공양물 바구니를 들고 하나씩 신 앞에 바치고 기도했다. 동굴로 들어가며 물을 지나고 폭포물을 맞았다. 동굴엔 나무와 신 석상이 있고 그 안에서 정화의식을 행했다.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다른 가이드에 비해 꽤 대충대충 설렁설렁 넘어가며 빠르게 의식을 진행한 덕분에 처음 시작할 땐 몰려있던 사람들을 지나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이걸 의도한 거라면 천잰데? 가장 하이라이트인 폭포에서 오롯이 혼자 들어가 그의 안내대로 괴성을 세 번 질렀다. 괴성을 지르고 폭포물을 맞는데 너무 좋고 행복해서 찐 웃음이 나왔다.
"너무 좋아! 진짜 좋아."
한국말로 육성으로 내뱉었다. 폭포에서 나와 잉어들이 사는 연못에 들어가 여왕과 왕에게도 의식을 치렀다. 마지막 코코넛 물로 정화 의식을 두 번 거행하고, 이마에 표식을 새기고 마지막으로 실 세 개를 이용한 팔찌를 채워주었다. 나를 지켜줄 팔찌이니 빼지 말라고 했다.
아 온몸이 물에 적셔지고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한결 밝아지고 가벼워진 표정으로 나는 오늘의 행운에 감사했다.
팔찌 덕분이었을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맹렬하게 길을 막고 짖던 물 것 같이 사나운 개를 보고 어찌할 바 몰라 골목에 서있었다. 지나갈 자신이 없었다. 가면 물린다. 저 개는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골목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토바이를 탄 우붓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눈짓으로 무슨 일 있냐고 물었고 나는 개를 가리켰다. 아니다 다를까 그녀가 다가가자 개가 맹렬히 짖어댔다. 그녀가 개를 저지해 주고 오토바이로 막아줬다. 나는 무사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너무 멀리 와서 그랩 잡기가 좀 걱정이 되었다. 희한하게 그랩은 현재 위치가 똑바로 표시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사방엔 들개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애를 먹고 있을 때 오토바이 하나가 다가왔다. 'transportation?' Yes! 그는 처음 올 때보다 두 배 이상의 요금을 요청했다. 평소 같으면 읭? 싫어.라고 했을 텐데. 나는 이 생명력이 넘치고 정기가 넘치는 우붓에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다. (어차피 거스름돈도 없었다)
다소 성의 없던, 그러나 할 건 다 해준 가이드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담아 꽤 넉넉한 팁을 줬다. 그는 표정이 바로 변하더니 감사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뭐랄까. 나는 다음번 그가 다른 동양인 여자를 만나면 더 친절하고 정성을 다할 거란 게 느껴졌다. 이건 다음 사람을 위한 선물이었다. 그리고 오토바이 청년은 숙소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 준 우주와 운명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는 기뻐하며 내 손을 잡고 악수했다.
엊그제 위빳사나 담마 발리 센터에서 날 구해준 Yeti는 무슬림이었다가 불교를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인도네시아 사람으로서 그 어떤 것도 믿지 않고 살아가기란 너무 어렵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나는 종교가 없지만 신념은 내게 중요하고 그건 플라세보 효과가 아니라고 말했다. 한국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운데 영어로 설명하려니 더 어려웠다. 그저 내가 믿으면 그때부터 그건 진짜야. 진짜 현실이야.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나는 물이다. 임수일간이고 넓고 깊은 바다의 기운을 지니고 태어났다. 감정의 폭 격차가 크고, 감수성이 예민하다. 물은 내게 특별하다. 이런 날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하루 삶의 여정에 따라서 중요한 순간에 도달한 느낌! 아직 여행은 1/3쯤 지났지만, 우붓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이 정화의식이다. 오늘이다.
살면서 몇 번을 곱씹어볼 순간이었다. 사원에 오기 전 목걸이의 열쇠와 운명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새겨둔 펜던트가 사라진 걸 발견했다. 목걸이가 통째로 사라졌으면 그저 내 부주의의 소관이라 생각했을 텐데, 목걸이 줄은 여전히 목에 걸려있었고 펜던트 두 개가 사라져 버렸다.
아쉬웠지만, 생각보단 떨치기 쉬웠다. 어쩌면 내가 기록하고 결심한 운명과 소망을 우붓에 두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폭포에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