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풀 에세이
“세상 모든 트로피는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
이 아름다운 명제는 스포츠 정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까? 예를 들어 FA컵 우승 트로피와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의 가치를 같다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FA컵 우승팀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축구 대회의 트로피. 그것의 가치는 트로피의 크기만큼이나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비록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도덕책에 나올만한 위의 문구를 성경 읽듯 외고 있자면 “그게 무슨 헛소리야?”라는 악마의 비웃음이 들리니까 말이다.
이런 악마의 비웃음을 듣지 않을 방법은 한 가지다. 바로 눈 앞에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 리버풀의 목표도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쥔 리버풀은 UEFA에서 주관하는 또 다른 대회인 유로파리그의 챔피언과 맞붙게 되었다. (챔피언스리그에 비하자면 끗발이 약한 대회다. 어느 정도 약한지는 챔피언스리그 트로피와 유로파리그 트로피의 크기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두 챔피언이 맞붙는 단 한 번의 경기는 ‘Super Cup’이라 불리며 경기의 승리자는 진정한 유럽의 왕으로 등극한다.(사실 거짓말이다. 이 경기에서 이기나 지나 유럽의 왕은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다) 그런 이유와 더불어 기왕 리그 중에 한 경기를 더 치르는 고통을 감안한다면 우승컵을 들고 돌아가는 편이 낫다.
단판승부. 이런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날카로운가 가 아니다. 이 승부에서 필요한 것은 디테일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단함이다. 마치 잘 만들어진 의자와 같은 단단함 말이다.
“의자는 건축을 닮아있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며 어느 의자 제작회사의 광고 문구가 아니다. 실제 그렇다. 하중을 견뎌야 하는 다리의 구조, 기둥과 받침, 이음새와 디자인까지… 건축에 필요한 공학은 의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기에 건축가들은 건축에 앞서 의자를 만들어보기도 하며 가구 제작자들은 의자를 가장 까다로운 가구로 생각하곤 한다.
좋은 의자를 본다는 것. 그리고 앉는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시각 경험과 촉감, 그리고 물리적 경험을 완전히 뒤바꿔 놓곤 한다. 좋은 의자는 공간에 어울리는 모습을 지니고 있으며 내 몸을 어떻게 받치면 좋을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번 경기에서 피르미누가 리버풀 팬들에게 선사한 감각처럼 말이다.
리버풀 부동의 주전 공격수 피르미누는 이번 경기 벤치에서 시작했다. 전반 내내 그는 편한 의자에 앉아 안락함을 만끽했을지 모르지만 리버풀 팬들은 그러질 못했다. 피르미누가 빠진 리버풀의 공격을 보는 것은 독서실 의자에 앉은 것과 비슷했다. 그만큼 불편했고 그만큼 지루했다.
다행히 후반 시작과 동시에 피르미누가 등장했다. 그가 중앙 공격의 꼭짓점에 서는 것과 동시에 리버풀 팬들의 의자는 독서실 의자에서 임스 라운지체어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임스 부부는 의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말하자면 의자계의 지네딘 지단이다. 건축을 전공한 남편 찰스 임스와 그림과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한 아내 레이 임스. 두 사람은 서로의 공학적 지식과 예술적 감각을 합쳐 의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합판을 구부려 제작하거나 유리섬유, 혹은 철사와 알루미늄을 사용하는 등, 임스 부부는 소재의 다양성은 물론이고 그 소재가 앉는 이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의자를 제작했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들 중 하나가 ‘임스 라운지체어’다. 편안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지옥 끝까지 가서 찾아왔다는 듯 어떤 불평 많은 이라도 입을 닫을 정도로 안락함을 주는 이 의자는 지금도 임스 부부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고가의 가격표를 자랑하긴 하지만 문제는 없다. 리버풀의 팬들이라면 바로 이 경기, 피르미누를 보면 그 안락함이 뭔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피르미누의 등장으로 리버풀 공격진에는 전반에 없던 유기적 움직임이 살아났다. 피르미누의 장기인 경기장 전체를 보는 시야는 그로부터 시작되는 공격 작업을 물 흐르듯 이어주었던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수많은 패스 중 하나다. 하지만 공이 어디서 자신에게 올 것인지, 자신이 그 공을 어디서 받아야 할지, 그 공을 받을 때 동료들은 어디에 있을지까지 디테일한 예측을 한 뒤에 이어지는 패스는 단순한 기록으로 표현할 수 없다. 실제 이 경기에서 그가 연결해 준 수많은 패스를 보면 이를 반박할 수 없다. 그런 피르미누의 패스가 잦아지자 전반전 내내 마음을 졸였던 리버풀 팬들은 비로소 몸과 마음의 하중을 피르미누라는 의자에 전적으로 맡길 수 있었다.
피르미누라는 이름의 의자. 그것이 주는 안락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하중을 견디는 견고함에서 나온다. 말하자면 피르미누의 존재는 트로피가 걸린 무게감 있는 경기의 하중을 제대로 받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누군가 그런 하중을 견뎌준다면 나머지 이들이 할 일은 그 위에서 방방 뛰는 일뿐이다. 그리고 그런 팀이 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비록 승부차기까지 간다 해도 말이다.
첼시와의 슈퍼컵. 이 경기의 승리를 통해 리버풀은 트로피를 얻었다.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보다는 작은, 하지만 챔피언스리그 트로피가 없었더라면 도전을 할 수도 없었을 트로피. 그것 외에도 새로 영입한 백업 골키퍼 아드리안은 자신의 능력으로 생애 첫 우승을 맛보았고, 조금 늦게 시즌을 시작한 마네는 두 골로 자신감을 얻었다. 그리고 리버풀은 우승이라는 달콤한 보상을 보너스로 안고 새로운 리그를 헤쳐갈 동력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 그 시작에는 피르미누의 디테일이 있었다. 그의 디테일은 경기장에 차곡히 쌓여 단단한 네 다리가 되었고, 그것은 곧 경기의 무게를 견뎌주었다. 이것이 답이다. 챔피언의 무게, 긴 시즌의 무게, 그리고 트로피의 무게. 그것을 모두 안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한 리버풀의 성공은 바로 이것에 달려 있다.
그와 그들의 디테일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