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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예술가의 위로법

#노르망디, 호크니

by 최동민


잠들기 10분 전, 침대맡에서 떠나는 게으른 여행 이야기.

<자정무렵 여행하기> 최픽션 입니다.


위드 코로나가 시행된 이후, 연말 휴가를 계획한 분이 많으실 것 같아요.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바람에 우리는 또 걸음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어찌 보면 허탈하고 또 어찌 보면 맥이 탁 풀리는 일인데요. 그렇다고 그냥 한숨만 내쉬고 있을 수는 없겠죠.


저도 2년 정도 이어지고 있는 이 코로나 시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되돌아보고 있습니다. 이왕 밖으로 나설 수 없다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자 마음먹었던 것도 벌써 지난해 초였던 것 같네요. 그때 마음으로는 글도 잔뜩 쓰고 유튜브도 구상해 보고, 각종 공모전에 도전할 픽션 아이디어도 짜놓아야지!라며 호방한 결심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결심 중 하나라도 해낸 것이 있느냐… 묻는다면 괜히 못 들은 척 대답을 회피해버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여러분은 어떤가요?



위기의 순간을 맞을 때.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모두가 다릅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몹시도 특별한 태도를 견지한 한 예술가를 만나기 위해 노르망디로 여행을 떠나볼게요. 노르망디 하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때문인지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공간으로만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름들은 어떨까요? ‘몽생미셸’, ‘루앙 대성당’, ‘지베르니’, ‘에트르타’ 이런 이름들 말이죠.


이 모든 것이 노르망디에 있습니다. 파리로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꼭 하루는 시간을 내서 다녀온다는 몽생미셸. 이곳의 역사는 709년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대 허허벌판인 암석 위에 하나의 교회가 자리를 잡았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에는 수도원과 성벽, 그리고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교회로부터 시작된 공간이어서 그런지 성지 순례지로도 잘 알려져 있고, 그런 것을 다 차치하고라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관은 잠시 파리라는 도시를 잊게 만들 정도죠.


루앙 대성당과 지베르니는 모네로 대표되는 장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상파 화가의 대표이자 지주였던 모네는 연작 그림을 많이 그렸죠. 그 이유는 그가 빛을 담는 인상파의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피사체든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하나의 피사체를 연작으로 그려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물론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피사체의 아름다움, 다른 하나는 피사체가 빛을 받아들이는 자세. 이 두 가지죠. 모네는 수련이라든지, 기차역이라든지, 지금 말하고 있는 루앙 대성당같이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피사체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피사체들은 빛을 거부하지 않는 피사체라는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루앙 대성당의 경우에는 하얀 벽면이 빛을 흠뻑 받아들이기 때문에 모네가 캔버스에 옮기기에 너무나 적합한 피사체였던 것이죠.


재밌는 것은 루앙 대성당과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가 모두 노르망디에 있다는 사실인데요. 이것만 봐도 이 공간이 얼마나 빛이 많고 아름다운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인지 해가 짧은 지금 같은 계절이면 노르망디를 더 상상해 보게 됩니다.


에트르타 이야기도 잠시 해볼까요? 노르망디 해안의 거대한 코끼리 모양으로 자리 잡은 에트르타. 이곳을 처음 ‘코끼리 바위’라고 부른 것은 작가 모파상이었습니다. (사실 모파상이 아니라도 누구나 이곳의 바위를 처음 보면 동물원에 간 어린아이처럼 ‘아, 코끼리다!’라고 외칠 거예요. 그 정도로 코끼리와 비슷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유명 인사가 이름을 붙여주면 그 이름은 더 힘을 받기도 하니까요. 모파상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작명권을 넘겨주도록 하죠.


아무튼 이 에트르타는 모파상 이후 수많은 예술가들의 걸음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물론이고, 문학가들도 이곳에서 엄청난 영감을 얻었죠. 그중 한 사람은 모르스 르블랑인데요. 그는 자신의 대표작 <괴도 뤼팽>에서 이 에트르타를 사용합니다. 그것도 뤼팽에게 아주 중요한 장소로 말이죠. (이 이야기는 꽤 길어서… 다음 자정 여행 때 한 번 따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 노르망디라는 공간은 오래된 예술가들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현대의 예술가들도 노르망디는 머물고 싶은 장소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증거로 현재 가장 비싼 화가 중 한 사람이 바로 이곳. 노르망디에 머물고 있는데요. 그는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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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니가 노르망디에서 태어났을까? 그래서 그 맑은 푸른색의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걸까?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예상과 달리 호크니는 내륙 중의 내륙… 영국 브래드퍼드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시기도 전쟁 중의 불안한 시기였기 때문에 호크니는 집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처럼 말이죠.


이 당시 그가 집에서 주로 했던 것은 바로 ‘공상’이었어요. 호크니는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를 그리고 지웠다를 반복하며 이 지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요. 종이에 그 공강을 옮기지 못한 이유는 돈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전쟁의 시기였기에 종이를 만들 나무도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종이를 아이의 그림에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호크니는 버스 표같이 종이로 보이는 물건이 보이면 뭐든지 스케치했다고 하죠. (지금 그 버스 표가 있다면… 이런 헛헛한 공상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당시 어린 호크니는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생활비를 모두 해결하고 약간의 운이 따라준다면 종이 살 돈을 마련하는 삶. 그만하면 괜찮은 삶일 것이다.

이런 소박한 꿈을 안고 호크니는 브래드퍼드에서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꾸준함이 보상을 받은 것일까요? 호크니는 학교 선생님이 대신 제출해 준 공모전에 당선을 하면서 처음으로 돈을 벌게 되고, 그 돈으로 뉴욕행 티켓을 끊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한적한 마을을 떠나 대도시의 상징인 공간에서 자신의 진짜 예술 활동을 시작했죠.


그러다가 자신의 그림을 알아봐 주고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해준 카스민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와 로스앤젤레스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도착한 로스앤젤레스는 호크니에게 너무나 딱 맞는 공간이었던 것이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영국이나 뉴욕과 달리 너무나 화창한 날씨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도 한몫을 했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로스앤젤레스에는 헐리우드가 있었습니다. 앞서 호크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빼먹은 것이 바로 호크니가 영화광이었다는 점이었는데요. 호크니는 실제로 자신을 키운 것은 부모님과 영화였다고 말했을 정도니, 당시 모든 영화 산업의 중심이었던 헐리우드에서 같이 숨 쉰다는 것은 호크니에게 거대한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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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로스앤젤레스에 아예 정착해버린 호크니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첨벙’시리즈를 연달아 발표하면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죠. 지금 호크니의 그림을 보면 전통회화이긴 하지만 인상주의의 화풍과는 전혀 다른 현대적인 감각이 눈에 띌 거예요.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호크니의 그림에서는 인상 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빛’이 너무나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수영장을 그린 ‘첨벙’시리즈를 보면 수영장 물에 비친 빛이 너무나 현실적이고 또 아름답게 그려지는데요. 물이야말로 빛의 다양한 면을 보여주는 오브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호크니와 인상주의와는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미술 문외한으로서 덧붙여 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호크니는 노년을 보낼 장소로 우리가 오늘 떠나온 상상 여행지 ‘노르망디’를 택하게 됩니다. 그 옛날 모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노르망디에 정착한 호크니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인데요. 그건 바로 우리에게도 똑같이 닥쳤던 그 사건, 팬데믹입니다.


프랑스는 팬데믹이 심해지자 자택에서 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명령은 바이러스가 그렇듯이 유명도를 고려하지 않아서 호크니도 노르망디의 저택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죠. 그렇게 되자 호크니는 노르망디의 에트르타도 못 가고, 루앙 대성당도 못 가고, 몽생미셸도 못 간 채, 그저 집 앞 정원을 돌보는 정도의 활동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죠(물론 정원은 없습니다만…)


이 시간, 홀로 갇혀 지내야 하는 이 팬데믹의 시간. 호크니도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집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보고자 머리를 굴렸겠죠. 특히나 호크니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재밌고 특별한 일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 인물이었고 그런 호기심은 나이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금발의 머리도 “금발을 하면 특별한 일이 생겨요!”라는 염색약 광고를 보고 시작한 것이었어요)


호크니는 이런 호기심을 살려 그렇다면 예술가인 자신이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합니다. 이를 위해 호크니는 캔버스와 붓, 물감을 내려놓죠. 그러고는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리고 아이패드에 매일 드로잉을 했죠. 이것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같이 모두가 갇혀 있는 상황에서 예술가가 전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캔버스에 그린 그림은 미술관에 가야 볼 수 있지만, 아이패드에 그린 그림이라면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켜면 볼 수 있으니까요.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링크를 타고 호크니가 있는 노르망디로 또 한 번의 상상 여행을 가볼까 하는데요.

인터넷 주소를 비행기 티켓 삼아 같이 떠나볼까요?


https://www.hockney.com/home

주소로 잘 찾아오셨나요?

이제 감상할 것은 그가 ‘Works’ 메뉴에 남긴 수많은 꽃의 그림입니다.

호크니는 노르망디에서 자란 수선화를 비롯해 다양한 꽃을 드로잉 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우리 모두에게 공개했죠. 이것이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란다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에요.


누군가는 그의 바람처럼 이 작은 그림에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 작은 그림에서 노르망디의 정취를 즐기기도 했겠죠.

저는 오늘 저와 함께 오신 여러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노르망디에 사는 어느 노예술가가 정성껏 담아 전한 노르망디의 정서와 위로의 마음을 전달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랬듯이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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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노르망디의 꽃밭을 여행할 당신을 위해 자정 여행 가이드는 여기서 마쳐볼게요. 제가 그린 것은 아니지만, 호크니의 그림이 당신의 하루를 위로해 주었길 바랄게요.


그럼 다음 자정 여행 때까지.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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