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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루즈의 아웃사이더

#물랭루즈, 로트렉, 제인아브릴

by 최동민



잠들기 10분 전, 침대맡에서 떠나는 게으른 여행 이야기.

<자정 무렵 여행하기> 최픽션 입니다.


“풍차를 보러 여행을 왔어.”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백이면 백 “아, 네덜란드에 갔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떤 특별한 이들은 오늘 우리가 함께 떠날 자정의 여행지. ‘물랭루주’를 떠올리실지도 모르죠.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주’ 이곳은 1889년에 만들어진 카바레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클럽(?) 정도라 말하면 좋을까요?


그렇게 말하기에 조금 애매한 것이 일반적인 클럽이라면 공연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물랭루주’에서는 매일 밤 멋진 무희들의 공연이 펼쳐졌어요. 이를 위해 물랭루주에는 뮤직홀이라 불리는 무대가 있었는데요. 무희들의 춤 공연만 펼쳐진 것은 아니었어요. 이곳에서는 당시에 유명했던 샹송 가수였던 미스캥게트를 비롯해 샤를 트레네, 샤를 아즈나부르, 린 르노, 부르빌, 로제 피에르, 장 마크 티보, 페르낭 레이노 같은 뮤지션들이 앞다투어 공연을 했습니다. 또한 신인 뮤지션이나 예술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요. 지금도 매일 저녁 2번의 공연이 열릴 정도로 물랭루주는 가장 역사적인 클럽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거예요.


그런 물랭루주는 지금은 그렇게 외진 곳이라 생각되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지만, 과거에 그 자리가 있던 몽마르트 지구는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해 뒷골목 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고 해요. 자연히 해가 뜬 낮보다는 달의 밤 기운을 즐기던 공간이기도 했고, 해를 등지고 싶었던 예술가들이 주로 찾는 곳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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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저는 이 사람을 꼽고 싶어요. 툴루즈 로트렉을 말이에요. 화가 로트렉은 당시 물랭루주를 대표하는 손님 중의 하나였어요. 그런 명성이 있었을 만큼 그는 물랭루주를 자주 찾았는데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여느 화가들처럼 생전에는 유명해지지 못해 가난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불우한 어린 시절과 방탕한 삶의 종점이 이곳이었기 때문일까요? 사실 둘 모두 정답이 아닙니다.


툴루즈 로트렉은 높은 신분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풀네임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렉 몽파’였는데요. 이름이 길수록 이름난 가문의 자제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로트렉 가문도 꽤나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문제는 이런 가문일수록 순수 혈통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근친혼이 많았다는 것인데요.

그런 이유로 유전적인 병들이 자주 발생하곤 했습니다. 로트렉도 유전 병을 안고 태어났는데요,


선천적으로 뼈가 약했다고 하죠. 그래서였을까요. 로트렉은 어린 시절 의자에서 일어나다 쓰러지는 일을 겪었어요. 그리고 이때, 그는 좌측 대퇴골이 부러져버리고 맙니다. 보통이라면 어린 나이였기에 금방 회복을 했겠지만, 선천적으로 뼈가 약했던 로트렉의 상처는 결국 아물지 못했죠. 설상가상 1년쯤 지났을 무렵, 로트렉은 산책 중에 마른 웅덩이 자리를 지나다 미끄러지고 마는데요. 이번에는 오른 다리가 부러지는 불운을 겪게 됩니다.


로트렉은 이때부터 키가 성장하지 못했다고 하는데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차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의 아버지였죠. 아버지는 마초적인 인물이었고 가부장적고 권위적인 모습을 온몸에 두르고 살던 인물인데요. 남자라면 당연히 잘해야 하는 사냥을 자신은 할 수 없는 몸이 되자 로트렉을 철저히 무시하기 시작했죠.


그런 이유로 로트렉의 아버지는 로트렉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하지 않든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봤습니다. 그것은 로트렉이 좋아하는 말 그림을 그리겠다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죠. 사실 로트렉도 다리를 다치기 전까지는 승마를 한다거나, 뛰어다니는 말을 보는 것을 즐기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다리를 다쳐 더는 말을 타지 못하자 말을 그리기로 결심한 것이죠. 하지만 어떻게든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겨내려는 아들의 모습과 다리 아버지는 고개를 돌릴 뿐이었습니다. 애초에 그림을 권한 것이 자신이었음에도 말이죠.


그런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낸 로트렉은 청년 시절, 어머니와 삼촌의 도움으로 좋은 그림 스승 프랭스토를 만나게 됩니다. 로트렉처럼 몸이 좋지 않았던 프랭스토는 그런 자신이 살아온 방법이었던 유머와 그림을 로트렉에게 가르쳐 줍니다. 덕분에 로트렉은 집에서는 지을 수 없었던 미소를 그를 통해서 해소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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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에너지를 얻은 로트렉은 그제야 다시 달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결심은 아버지라는 거대한 성(실제로 그의 집이 성이기도 했지만…) 을 벗어나고자 하는 결심이었죠. 그리고 그가 택한 곳은 바로 파리였습니다. 그림으로든 삶으로든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지금 가장 뜨거운 공간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렇게 파리에 도착한 로트렉은 미술학교를 다니며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때 만난 동료 중 한 명이 빈센트 반 고흐였습니다.) 로트렉은 이렇게 그림을 배우면서 자신이 진짜 그리고 싶은 것을 깨닫기 시작했는데요. 그것은 바로 ‘움직임’이었습니다. (이 시절 카메라와 영화가 있었다면 로트렉은 분명 영화감독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목은 <LA LA LAND>정도 였을테고요.) 그가 움직임을 포착하고 싶었던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달리는 것을 무엇보다 좋아했지만, 결코 내달릴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반작용 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의 움직임을 그릴 것인가 였습니다. 그가 사랑한 선배 화가 드가가 발레리나를 그린 것처럼 로트렉에게도 가장 화려한 움직임의 피사체가 필요했죠. 이를 위해 로트렉은 경마장을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가 선택한 곳이 바로 ‘물랭루주’입니다.




최고의 무희들만 모이는 물랭루주. 이곳의 무대에는 매일 밤, 프랑스에서 가장 빠른 춤을 추는 이들이 역동적인 무대를 만들어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제인 아브릴이었죠. 물랭루주 최고의 댄서로 이름 높았던 그도 로트렉처럼 선천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틱장애와, 몸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고 흔드는 무도병(헌팅턴 병) 증세를 보였던 제인 아브릴. 그는 치료를 받던 중, 의사로부터 아예 춤을 춰보라는 권유를 받고 댄스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치료를 위해 시작한 춤이었는데 거기에 그녀의 모든 재능이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그녀가 춤을 출 때면 정말이지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라며 혀를 내둘렀는데요. (물랭루 주가 술을 파는 곳이고 대부분 만취를 목적으로 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로트렉도 그녀의 춤에 푹 빠져 버립니다. 마침내, 자신이 진짜 담고 싶은 움직임을 가진 이를 만난 것이었죠.


이때부터 로트렉은 제인 아브릴을 중요한 모델로 삼습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의 드로잉으로 그녀를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물랭루주의 포스터 작업을 할 때, 제인 아브릴을 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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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로트렉의 포스터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은데요.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라고 한다면 누구나 로트렉을 손에 꼽습니다. 그만큼 로트렉은 순수미술에 해당하는 작품뿐 아니라, 물랭루주를 비롯해 또 뮤지션의 공연 포스터와 같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화가였기 때문에 포스터도 하나같이 그때는 보지 못했던 혁신적인 그림이었죠. 예를 들어 포스터의 글씨가 인물의 뒤에 와서 겹쳐 보이게 한다든가, 같은 타이포를 반복해 그린다거나 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 봐도 아름다운 그 포스터를 얻고자 당시의 사람들도 일부러 공연을 찾았을 정도니 그의 작품에 대한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대중들에게만 인정받은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로트렉은 1900년 만국박람회 포스터 부분에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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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물랭루주’로 자정의 여행을 떠나 그곳을 무대로 활동한 로트렉과 제인 아브릴 이야기까지 해보았는데요. 아쉬운 것이 있다면 카메라가 없던 시기여서 제인 아브릴의 춤은 감상할 수 없다는 점일 거예요. 하지만 로트렉이 그린 제인 아브릴의 그림, 그것을 통해 그녀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또 상상해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로트렉과 제인 아브릴, 그들과 함께 물랭루즈의 분위기를 상상하며 자정의 여행을 마쳐볼게요.


우리는 다음 자정 여행 때 꼭 다시 만나요.

그때까지.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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