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연극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SF 웹소설 <잔차품>은 사람들이 거대 인공지능 '에덴'에게 일상의 모든 것을 의탁한 채 살아가는 세계를 묘사한다. 처음에는 에덴이 집안의 온도를 제어하는 등의 각종 잡일을 대신하는 인공지능 비서에 그쳤지만, 조금씩 조금씩 그 기능을 확장하며 기초적인 교육과 기분의 제어까지 휘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용한 대목은 과거 에덴의 위험성을 고발하려다가 죽은 과학자가 남기는 말이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잊었습니까. 분노, 초조, 고통과 우매함은 인류가 극복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인류 영혼의 본래 모습이라는 사실을요. 당신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추한 것, 당장이라도 뜯어내고 싶은 것,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 그 자체입니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모종의 이유로 에덴이 붕괴된 후 그 잿더미 위에서 각자의 신념을 좇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을 그린다. 자연히 '자유의지'라는 키워드가 작품 내내 등장하는데도, 그것의 정체를 미화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자유의지를 지닌 채 독자적인 존재로 살아감은 고통스러워야 마땅하다.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힘만으로 가누기가 어렵기에 끊임없이 기댈 곳을 찾으려는 것까지도 "인류 영혼의 본래 모습"일까?
이제 슬슬 연극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 것 같다. 내게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댈 곳 없는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는 버팀목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이야기다. 총 2막으로 구성된 극의 플롯은 단순하다. 1막에서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는 나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공터에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묘하게 겉돌고 공터에는 할 일도 없지만 그들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자리를 비운 새 고도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간을 죽이는 사이 ‘포조’와 ‘럭키’가 찾아온다. 나무랄 데 없는 자본가의 행색을 한 포조는 짐꾼 럭키의 목에 밧줄을 걸고 채찍으로 명령한다. 그들이 공터를 떠나고, 해가 지고 나서야 웬 심부름꾼 아이가 나와서는 고도 씨가 내일'은' 올 거라는 전언을 남긴다.
그러나 2막이 시작되었을 때, 나름의 희망에 찬 디디와는 달리 고고는 어제 벌어졌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포조와 럭키도 다시 공터를 찾아오나 그 사이 포조는 눈이 멀고 럭키는 목소리를 잃었다고 한다. 당황한 디디가 바로 어제까지도 멀쩡했던 사람들이 도대체 언제 그렇게 되었냐고 계속해서 캐묻자, 포조는 화를 내며 '언제'를 물어보는 짓은 관두라고 외친다. 그들이 또 다시 비틀비틀 사라진 후 심부름꾼 아이가 찾아온다. 디디는 아이가 무슨 말을 할지 이제 짐작할 수 있다. 고도는 오늘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일은 정말로 올 것이다.
고도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고도는 무엇인가? 신인가, 사람인가, 혹은 그밖의 이상인가? 다양한 답변이 있겠으나 이 글에선 고도의 구체적인 정체를 추론하지 않는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고고와 디디가 고도의 존재(혹은 고도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점이다. 이 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대 공간—나무가 있는 공터의 의미부터 고민해야 한다. 두 사람의 대사에 따르면 공터 바깥의 세상은 따로 있고, 둘 다 밤에는 그 세상에서 머물다가 낮에는 공터로 돌아와서 고도를 기다린다. 동시에 공터의 나무는 언제든 삶의 중단 가능성으로서 고고와 디디의 곁에 존재한다. 즉 작품 내부에서 '죽음'이 '나무에 목을 맨다'라는 형태로 제시되는 만큼 공터는 저승과는 그 궤를 달리하나, 공터에서 벌어진 일이 역사로서 누적되지 않고 바깥 세상 역시 별개로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현실의 복제라 보기도 어렵다.
이때 이 공터에서 할 수 있는 행위는 '고도를 기다린다/목을 매서 죽는다'로 압축될 수 있다. 공터를 그냥 떠날 수는 없다. 두 사람이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까닭이다. 동시에 기다림을 이어간다는 것은 기나긴 하루를 버티어 오늘도 고도가 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세상에서 밤을 지샌 뒤 공터로 돌아와 새로운(그러나 똑같은) 하루를 맞이한다는 것—삶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터는 기다림과 죽음, 곧 삶과 죽음을 놓고 끝없이 선택이 벌어지는 중간적 공간으로 해석 가능하다. 고고와 디디는 고도를 기다리며 죽지 않는 상태를 연장하고 있으므로, 이들에게 삶의 지속이란 자신들의 바깥, 고도에게 달려 있는 셈이다.
그러나 2막으로 접어들며 고도의 존재는 더욱 불확실해지고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시간을 견디는 것 역시 괴로움을 더해 간다. 이쯤에서 작가 사뮈엘 베케트가 두 번의 세계대전 후에 이 극을 썼음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뻔한 말이지만 전쟁을 거치며 인류 문명과 보편 가치에 대한 신화는 한 차례 붕괴했다(그리고 지금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과 이를 방관하는 국제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쌓아올린 문명을 다시 걷어차고 있다). 사람은 도대체 무엇에 삶을 의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생 내도록 기다릴 만한 그 무엇이 지구상에 있긴 한가? 이에 고고는 자신의 의식을 반쯤 닫은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거나, 언제든 구두를 벗고 죽음으로 뛰어들 것처럼 흔들거린다. 보다 제정신을 추구하는 디디의 경우 이렇게 토로한다.
블라디미르: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 하지만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에스트라공은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벗겨지지 않는다. 그는 다시 잠들어 버린다. 블라디미르가 그를 바라본다.) 저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겠지. 다시 얻어맞은 얘기나 할 테고 내게서 당근이나 얻어먹겠지...... (사이)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 (사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민음사, 오증자 역 <고도를 기다리며> 중)
그리고 또 다른 경우로, 박정자 배우가 연기한 '럭키'를 들 수 있다. 연극 치곤 비싼 가격을 감수하고 이 극을 보러 간 이유이기도 하다. 럭키는 자신을 '사람'에서 탈락시킴으로써 존재를 견디는 인간이다. 럭키가 포조의 소유가 된 경위는 극에서 등장하지 않으므로 이 탈락의 능동성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본에 의한 인간 소외일 것이고, 한 번 벗은 모자를 럭키 자신의 손으로 다시 쓸 수 없다는 점에서는 철저한 타자로 나타난다.
다만 베케트가 럭키를 조형하는 방식은 (이 극 전체가 그렇듯) 몹시 이중적이다. '럭키'라는 모순적인 이름부터가 그렇다. 자율적인 삶을 중단하고 타인(자본)에게 목줄을 내어주는 것이 차라리 '운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냉소가 내비친다. 그렇지만 생각을 명령받은 럭키가 자신의 '생각'을 쏟아내는 장면에서 관객은 극중 어떤 순간보다 강렬하게 몰아치는 힘을 경험한다. 녹슬어 삐걱대던 럭키의 혀가 조금씩 기운을 되찾고, 자신을 멈추려는 밧줄을 외려 마구 휘두를 때 생은 번쩍인다.
럭키의 '생각'이란 말이 되지 않는 말에 불과하고, 그 자신도 "왜인지는 모르지만"을 반복하며 현상의 파편을 곱씹을 뿐이라고 평할 수도 있다. 게다가 2막에선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목소리를 잃지 않나? 그러나 이것은 희곡이다. 배우의 몸을 입어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이다. 대사의 내용과 플롯보다 광인의 넋두리에 압도되는 한순간이 관객을 지배할 수 있다. 럭키를 여성-노인인 박정자 배우가 연기하며 이러한 강렬함은 배가된다. 사회가 지금껏 '미친-여성-노인'을 괄시해 온 이면에 자리한 두려움도 함께 덧씌워지는 까닭이다. 그 억눌린 성대가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불쾌한 진실이 줄줄 새어나올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가해 왔던, 혹은 우리를 짓누르는 압제를 폭로하여 애써 모른 척했던 것을 눈앞에 들이밀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결국 고도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는 물음은 인생을 언제까지 살아야 하냐는 물음과 다름없다. '고도를 왜 기다려야 하는가'란 물음의 답을 찾긴 더욱 요원하다. 고도를 나름의 무엇으로 정의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시도할 순 있겠지만, 이 작품은 그것보단 공터 뒤편 나무의 경도를 가늠하는 것이 쉽다고 말하는 듯하다.
에스트라공: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 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른다.
블라디미르: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이야.
에스트라공: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위의 인용처럼 두 사람은 작품 말미에서 재차 자살을 입에 올리지만, 그들은 끝까지 죽지도 결별하지도 않는다. 디디와 고고가 혼자가 아님은 작가가 남겨 둔 몇 안 되는 희망처럼 보인다. 뭐가 됐든 이 지난한 기다림을, 사람으로 태어난 순간 강요된 선택을 홀로 견디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작중 외로움과 혼자됨을 향한 공포는 이를 반증한다. 네가 먼저 죽어버리면 내가 목을 맬 때 내 다리는 누가 잡아주냐는 대사는 분명 코미디이겠으나, 삶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조건 또한 암시한다.
디디와 고고가 "가자"라고 말하면서 뚝 멈춰선 채로 끝나는 결말은 유명하다. 이 동작의 함의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간다는 것—무대를 떠난다는 것은 고도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도 쓸 수 있다. 목을 매지 않고—죽지 않고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 삶이란 가능한가? 물리적 차원이든 상징적 차원이든 '무대'를 벗어나 자신의 발으로,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서 비틀비틀 걸어가는 것이 가능한가? 걸음마다 치미는 삶의 이유를 향한 의문과, 차라리 누군가 내 목줄을 잡아 주면 좋겠다는 나약한 바람을 모두 저버린 채?
나는 베케트가 자신의 작품에 그 답을 숨겨 놓았다고 믿지는 않는다. 처음 텍스트로 이 작품을 읽을 때도 그랬고, 연극을 본 지금은 더 그렇다. 다만 '왜 자살하면 안 되는가'라는 오래된 논쟁에 굳이 눈길을 주기보단, 내 옆에서 꾸역꾸역 숨을 쉬는 고고(혹은 디디)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움직이지 않는 발을 들어보려 애쓰는 게 낫겠다고.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겠다고 마음을 먹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