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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복 Feb 08. 2024

원하는 대로 해 주지는 않겠어

책 <므레모사>를 읽고

*책의 결말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재의 첫 글으론 새 글을 써야지 싶었다. 최근에 본 콘텐츠는 많았으나 글을 쓰고 싶을 만큼 강렬했던 작품은 없었기 때문에 고민이 좀 됐는데, 불씨는 엉뚱한 곳에서 왔다.


웹툰도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다.

연재 소개에도 언급해 놨지만 나는 웹소설도 열심히 읽는데, 최근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비가 작가의 신무협인 <화산귀환>이다. 1600화를 훌쩍 넘긴 이 장편 소설의 댓글창에서는 종종 댓글과 악플의 경계를 오가는 난전이 벌어진다. 이들의 주된 요구 사항은 “이야기 진도를 빨리 빼라”로 요약된다. 물론 매일 한 화씩 유료 연재되는 작품 특성상 느린 전개가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겠으나, 이 글에서는 그 요구가 합당한지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렇다.


작가는 독자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가?






실시간으로 독자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웹소설을 단행본으로 출간되는 도서에 바로 비교할 순 없겠지만(이 이야기도 나중에 더 해 보고 싶다), 김초엽 작가의 SF 장편소설 <므레모사>로 이 주제를 논해 보려 한다. 이야기를 작가가 의도한 방향으로 쭉 밀어붙이는 힘이 인상적인 작품인데, 주인공 ‘유안’이 독극물 유출로 폐허가 된 지역 ‘므레모사‘에 방문한 뒤 벌어지는 일과 그녀의 과거를 교차해서 서술한다.

유안은 세계적인 무용수였으나 사고로 한쪽 다리를 허벅지부터 절단했다. 의족을 끼우고 고통스러운 재활을 거쳐 다시 무대에도 올랐지만 지금은 그만둔 상태다. 그동안 유안은 재활을 맡았던 치료사 '한나'와 연인이 되었고 또 헤어졌다. 그런 그녀가 다크 투어리즘 체험단에 끼어 므레모사로 출발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의 플롯은 복잡하지 않다. 독극물 유출 후 정부에 의해 수십 년간 은폐됐던 마을에는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며, 유안은 그 실체에 조금씩 다가간다. 체험단의 다른 멤버들은 이 음모에 속절없이 끌려가지만 유일하게 이 마을의 진실을 밝혀내려 방문한 남자, 레오도 존재한다. 유안은 처음에는 이 남자를 껄끄럽게 여겼으나 문제가 커질수록 그와의 협력을 이어간다.

 

어쩌면 여기까지 읽고 <므레모사>의 결말을 자연스레 짐작해 볼 수도 있을 테다. '이런 류의' 소설이나 영화를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니고, 독자들도 '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을에서의 탈출을 눈앞에 둔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안은 레오의 가슴팍을 찌른다. 죽이려고 찌른 것이 맞다. 소설 중반부터 서서히 벌어지던 균열이 폭발할 때의 카타르시스는 정말이지 대단하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강력한 의지를 느낀다. 유안의 의지와, 작품 뒤 작가의 의지를.






두 가지 의지를 살펴보기 전에, '요구'라는 개념부터 검토해 보자. 요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요구하는 자와 요구받는 자가 모두 존재해야 할 것인데, 여기서는 개인-개인의 관계를 이야기해 보겠다. 요구는 기본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청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상적으로는) 자유로운 개인이 동일하게 자유로워 마땅한 개인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자유의지라는 대전제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요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할 것 같다. 1)요구하는 자가 상호의 합의 아래 요구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2)요구받는 자가 요구를 수락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삐끗하면 요구는 부당한 것, 즉 강요가 될 것이다.


유안과 한나의 관계는 이 '요구'와 '강요'의 경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나의 직업은 재활 훈련사이고, 그녀는 자신이 예전부터 좋아했던 이 무용수가 다시 움직이고 날아오르도록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하면서 이는 단순한 계약 관계 이상의, 진실한 애정에 기반한 돌봄으로 유안의 일상에 녹아든다.

 

"솔직히 말하면, 예전만큼 춤추거나 움직이는 일이 기쁘지 않아. 사실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출 때, 가만히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져. 이건 상실과는 다른 것 같아. 상실은 잃어버린 거지만, 나는 그냥......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거야. 일종의 '변신'을 경험한 거지."
나는 최대한 유쾌하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한나는 내 말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유안, 마음을 잘 다잡아야 해. 지금 넌 회복되고 있는 거야. 몇 년이 걸리건, 나아지고 있는 거라고. (...) 살아 있는 건 곧 움직이는 거야. 왜 '생동한다'는 표현을 쓰겠어?" (90쪽)


이 대목은 두 사람 사이의 불화를 요약한다. 장애나 질병의 반대항을 치료로 놓는 것엔 글 한 편으론 다루지도 못할 만큼 무수한 문제가 있겠으나, 일차적으로 치료가 상대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대가 장애에서 벗어나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 일은 '통념'상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이것이 일종의 요구임이 망각되기 쉽다. 그러나 유안이 밝히듯 어떤 몸의 상태는 그저 "다른" 조건으로 자리한다. 움직임보다 정지가 편안해진 그녀에게 더 이상의 회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요구하는 상대가 한때 요구할 자격을 가졌던, 아직도 유안 자신이 사랑하는 중인 연인일지라도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이대로 멈출 것이라고. 당신들이 원하는 정상성의 신화 안에 이제는 나를 끼워넣지 않겠다고. 일반적인 '생'과 정반대로 작동하는 것 같지만 틀림없이 유안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기를 추구하고 있다. 클라이맥스에서 유안의 의지는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다. 독자가 흠칫 놀라 한 발짝 도망치고 싶을 만큼.






동시에 이러한 전개는 작품 외적 차원에서 독자의 일반적인 요구를 배반하는 일이기도 하다. 으레 비상식적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모험’ 소설이 따를 법한 플롯에서 핸들을 확 꺾어버린 까닭이다. 문제적인 상황을 제시해 놓고선 외려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주인공이라니? 그러나 이것은 운전 미숙에 의한 추락이 아니라, 악동뮤지션의 노래 한 소절을 빌리자면 “하늘을 나는 정도/그 이상도 느낄 수 있을 거야”에 가깝다. 자신이 달리는 길의 지도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운전자가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돌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연출 기법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얄팍하게 비교하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나, 아리 애스터 감독의 <미드소마> 같은 작품들 말이다.


<미드소마>와는 군집을 이루는 식물이란 소재도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차를 타고 가다 난데없이 절벽으로 떨어진 독자 입장에선 이렇게 반론할 수 있겠다. 아니, 이런 길로 갈 거라고 미리 말해준 적 없잖아요. 이때의 ‘억울함’은 이야기가 장르적일수록 강해진다. 여기서 ‘장르적’이라는 말은, 창작자와 소비자가 이야기의 전개와 인물 등에 대해 공통의 문법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다. <므레모사>를 SF가 가미된 모험 소설로서 읽는다면, 독자는 장르적 관습에 따라 주인공이 조력자와 함께 마을의 비밀을 명명백백 밝히고 어둠의 세력을 붕괴시키는 결말을 바랄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정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러한 요구에 반드시 부응할 필요가 있을까? 요구가 요구로 남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수락 여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창작, 특히 대중-상업 예술의 한 축으로서 존재하는 독자가 창작자와 그의 작품에 피드백할 자격을 가지듯, 작가 역시 자신의 의지대로 이야기를 풀어갈 권리를 가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이 팔리지 않는 것도 지겨운 자본주의 시대의 창작자가 직면해야 하는 현실이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란 (김초엽 작가의 코멘트를 인용하면) “'아,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도 좋아했었지' 새삼스레 깨닫는" 존재인 것이니.






다시 <화산귀환>으로 돌아가면, 아무래도 이 작품은 독자들이 원하는 서술을 순순히 해 줄 것 같진 않다. 이렇게 예상하는 데도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역시 핵심은 작가가 독자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는 없다는 점이겠다. 이 글이 창작자에게 무한정 창작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로는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부디 논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기를 바란다. 게다가 사실은, 창작자와 소비자 모두 이야기를—그것을 쓰고 읽는 '사람'까지 사랑한단 전제 아래, 그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끝없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곧 픽션의 즐거움 아닌가?


바로 그러한 마음으로 이 연재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이야기가 그리는 온갖 경로들을 때로는 응원하고, 때로는 딴지를 걸면서 이 여정을 즐기려고 한다. 콘텐츠 중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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