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 사이에서 까마귀 놀다

이중섭

by 이설

밤은 어두웠고 낮은 밝았습니다. 해가 지면 자고 해가 뜨면 깨어나는 하루가 다음 하루로 이어지며 사람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습니다. 곰이 사람이 되고, 알을 깨고 나온 배꼽 없는 사람들이 나라를 세웠습니다. 해는 어김없이 지고 떴지요. 그 덕에 씨앗은 자라 열매를 맺었고 사람들은 땅에 기대어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행복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 처음 전등(電燈) 불을 밝힌 해는 1887년입니다. 때는 3월 6일이었고 곳은 경복궁 후원 향원정 일대였습니다. 에디슨(1847~1931)이 전구를 만들어낸 해가 1879년이고, 세계 맨 처음 중앙 발전소가 1882년 뉴욕 펄가에 세워졌다고 하니 우리나라 전기 도입(導入)은 엄청 빠른 셈이죠?
자, 지금부터입니다. 거리에 전봇대가 세워지죠. 해는 지고 뜨고 지고 뜨고……, 그렇게 어김없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전봇대도 세워지고 또 세워졌습니다. 땅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은 밤이 어둡지 않은 도시로 모였죠. 거의는 가족과 떨어져 도시로, 더러는 가족이 함께 도시로.

이어지는 전봇대에 걸린 전선들이 도시로 전기를 나르건 말건 전선 위로 날아든 까마귀들을 본 사내가 있었습니다. 그 사내에게는 아내도 있었고 두 아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사내는 아내도 두 아들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내는 여기에, 아내와 두 아들은 저기에 있었거든요. 여기는 우리나라, 저기는 일본입니다.

"야, 야! 얘기 들었어?"
"뭔데 또?"
"비켜 비켜, 나도 좀 앉자!"
"에~이, 넓은데 놔두고 왜 여기로 비집고 들어오냐고! 왜~어?"
"야야야 자리 없어. 에고 나 떨어지겠다."
부산스러운 까마귀들 사이에 끼어 나도 참견하고 싶네요.



​사내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이중섭(1916~1956)입니다.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일본에서 만난 일본 여자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한 이중섭은 아내를 '따뜻한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뜻을 담아 '남덕(南德)'이라 부르며 사랑했습니다. 훗날 96 살 나이가 된 남덕은 이중섭과 함께 살았던 7여 년 시간 사랑이 남은 삶을 버티게 해 주었다고 말했지요. 서로를 이토록 사랑했던 부부가 왜 떨어져 살아야 했을까요?
1950년에 전쟁이 벌어지자 이중섭은 부산으로 제주도로 떠돌며 먹고 살 길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덕은 폐결핵에 걸려 피를 쏟고 아들들은 말라갔지요. 더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이중섭은 두 아들과 함께 남덕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여전히 전쟁 중이던 1952년이었죠. 이중섭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그릴 재료가 없으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새겼지요.


이중섭 그림 속 세계에 아픔은 없습니다. 외로움도 없습니다. 보름달은 넉넉한 빛으로 밤을 밝히고 까마귀들은 자기들끼리 즐거운 '달과 까마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다른 그림들에는 알몸인 아이들이 게랑 물고기랑 나비랑 꽃이랑 나무랑 어울려 행복하고, 소들은 세상 집어삼킬 듯 힘이 거셉니다.

소의 말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이중섭

일제강점기를 거쳐 전쟁으로 떠돌아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 거의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삶이었을 겁니다. 이중섭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죠. 그래서 아름다움을 보고 그렸음에도 끝내 지치고 맙니다. 어찌 되었든 그림 속 세상이 현실은 아니니까요.


해 질 녘 전봇대는 저에게 늘 어떤 아련함을 느끼게 합니다. 뭘까……, 보고 또 보며 생각했습니다. 부산스러운 까마귀들을 보면서도 그림 밖 전봇대를 생각했지요. 그러다 어렴풋이 알게 된 까닭은 '떠남'이었습니다. 땅에 기대어 살았던 사람들에게 낯설었을 떠남이 익숙해져야 살 수 있는 시대로 빠르게 바뀌던 때에 전봇대가 있더라고요. 마지못한 떠남에는 그리움이 꼭 붙어있고, 그리움은 어떻게 해도 그리울 수밖에 없죠. 그리워서 가봐야 떠나올 때 그곳은 이미 아니니까요.


전선 위 까마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저는. 비둘기, 참새는 본 적 있습니다.


덧붙임
1980년대 이후 만들어진 신도시에는 전봇대가 없습니다. '전기선 지중화 산업'으로 전기선들을 땅 속으로 넣어버렸거든요.
지금 있는 전봇대들도 하나 둘 사라질 겁니다. 먼 훗날 사람들이 '달과 까마귀'를 보면
"그런데 얘들은 어디에 있는 거야?"
라고 궁금해 할 수도 있겠네요.